항목 ID | GC04300414 |
---|---|
한자 | 渼湖津 |
이칭/별칭 | 미음포,노수포,미음진,독진,독음진,미음나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학수 |
[정의]
고려부터 조선까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던 나루.
[개설]
진(津)[나루]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주요 수상 교통로에 설치한 교통·통신 기관의 하나로서, 강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통제·관리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미호진(渼湖津)은 현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지나 팔당과 미사리를 거쳐 왕숙천(王宿川)이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인 강동대교 직전에 있었다. 미호진에서 한강을 조금 더 내려가면 광진[광나루]과 송파진, 한강진에 도달하였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여지도(輿地圖)』 등에는 독진(禿津)으로 표기되어 있고, 19세기 중엽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미음진(美音津)[혹은 미음진(渼音津)]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양주목조에서는 치소의 동남쪽 70리에 있고 광주(廣州)와 통한다고 하였으며, 광주목조에서는 치소의 북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한편 미호진[미음진]과 관련하여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미음촌(美音村)이란 이름이,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미음진(美陰津)·미음강(渼陰江)이란 이름이 보인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한강은 고려 시대 이래 내륙 지역의 조세 운반이나 부피가 큰 화물을 배로 운송하는 매우 중요한 수상 교통로였다. 포천(抱川)에서 발원하여 양주를 지나 남류하는 왕숙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미호진은, 인근의 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의 존재로 보아 삼국 시대 이래 한강을 무대로 한 주요 나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미음포(未音浦) 또는 노수포(鹵水浦)라 불렸으며, 수도 개경까지 조세를 운반하는 비용이 18섬당 1섬으로 책정된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미호진은 한강 수운을 이용한 물화(物貨)의 경유지 혹은 출발지로 번성하여 인근에는 이를 배경으로 발달한 마을인 미음촌(美音村)이 있었다. 또 군사 교통로 상의 길목으로도 중시되어,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했을 때에는 미음진 상하에 군사를 주둔시켜 선박과 행인을 수색·방수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79, 식화2 조운(漕運)]에 “992년(성종 11)에 조선(漕船)으로 서울까지 운반하는 비용의 액수[輸京價]를 제정하였다. …… 18섬의 운반비가 1섬인 곳 …… 노수포는 이전에는 미음포라고 하였는데 광릉군(廣陵郡)[한양]에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 양주목 교량]에 미호진은 독음면(禿音面)에 있으며 양주 치소 남쪽으로 60리 떨어져 있고 사선[私舡] 1척이 있다. 『대동지지』 진도조에 미음진은 동남쪽으로 70리에 있으며 광주(廣州)와 통한다”고 하였다.
[변천]
미호진 건너편에는 광주 관내[현재 하남시 미사동]의 둔지(屯地)와 진촌진(津村津)이 있었는데, 진촌진에는 수참(水站)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 둔지에는 장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강물에 잠겼다. 둔지 건너편에 있는 나루가 미호진인데, 강 건너에서 미호와 석실서원(石室書院) 쪽을 바라본 전경이 조선 후기 겸재 정선(鄭敾)의 그림으로 전한다. 오늘날 이 자리에는 경기도 지정 미음나루 음식 문화의 거리[풍속 마을]가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