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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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 鄭氏 古邑洞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 |
시대 | 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서동일 |
개설 시기/일시 | 1750년 - 경주 정씨 고읍동 집성촌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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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주 정씨 고읍동 집성촌 -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 |
성격 | 집성촌 |
면적 | 1.49㎢ |
가구수 | 36가구 |
인구(남,여) | 144명 |
[정의]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에 있는 경주 정씨 집성촌.
[개설]
경주 정씨의 시조는 삼한 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의 여섯 촌장 중 한 명으로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지백호(智伯虎)란 인물이다. 신라가 건국되자 건국 좌명공신이 되었고, 유리왕 때에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받았다. 후손은 연일(延日)·동래(東萊)·온양(溫陽)·초계(草溪)·하동(河東)·진양(晉陽)·진주(晉州) 등 120여 개의 성씨로 나뉘었다. 경주 정씨 본종(本宗)은 원래 계림(鷄林)·월성(月城)으로 불리었는데, 고려 시대에 정진후(鄭珍厚)가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면서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경주 정씨는 정진후를 중시조로 삼는다.
파조는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파(月城尉派)·평장공파(平章公派)로 나뉜다. 후손은 주로 경기도 연천, 전라북도 임실, 전라남도 순천·고흥·신안, 경상북도 청송·김천, 경상남도 남해·통영, 충청남도 금산, 함경남도 영흥 등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인구는 2000년 기준으로 9만 4465가구에 30만 3443명이었다. 양주 지역 경주 정씨는 1985년 986명, 2000년 973명이었다.
[형성 및 변천]
고읍동의 경주 정씨는 정양경을 파시조로 삼는다. 원래 경기도 포천에 있던 정양경의 11세손 정우중(鄭祐重)의 묘를 양주 고읍동으로 이장한 뒤 후손들이 주변에서 대대로 살면서 경주 정씨 고읍동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입향조(入鄕祖)는 파시조 정양경의 14세손이자 정우중의 증손인 정현성(鄭鉉誠)이다.
[현황]
193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양주 지역의 집성촌 54개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경주 정씨 고읍동 집성촌의 규모는 1953년 20가구, 1977년 46가구[구 주내면], 1992년 36가구이었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전통 사회의 붕괴 및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급격한 이농 현상 때문에 점차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현재 경주 정씨는 양주시 고읍동 이외에도 회천동, 백석읍, 은현면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