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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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栗 |
이칭/별칭 | 관중(寬中),둔계(遯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관중(寬仲), 호는 둔계(遯溪). 증조할아버지는 부사직을 역임한 박시림(朴時霖)이고, 할아버지는 장사랑을 지내고 통례원 좌통례에 증직된 박환(朴渙)이며, 아버지는 활인서 별제를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된 박덕로(朴德老)이다. 첫째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감찰 신경(申璟)의 딸이다. 부인과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세자익위사 좌익위를 지낸 박천서(朴天叙)이다. 사위는 최경유(崔景裕), 송지(宋祗)이다. 둘째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영양수(永陽守) 이춘복(李春福)의 딸이다. 손자는 홍문관 수찬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으로 상주에 파견되어 26세의 나이로 전사한 박호(朴箎)이다.
[활동 사항]
박율(朴栗)[1520~1569]은 아홉 살 때 양친을 여의고 가난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였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8년(명종 3) 39세 때 문과 갑과 2등으로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다. 함경북도평사를 거쳐 공조 좌랑, 형조좌랑, 예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정언, 사헌부 지평, 병조 정랑,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쳤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북서쪽 변방의 오랑캐를 평정한다는 조정의 정책에 따라 평안도 도사로 파견되었다. 군기시 첨정과 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고, 1568년(선조 1) 봄 부모의 봉양을 청하여 진주 목사가 되었다. 이때 녹봉으로 나오는 곡식 다섯 되씩을 거두어 모았다가 굶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임금이 손수 쓴 칭찬 글과 옷 한 벌을 상으로 내렸다. 1569년(선조 2) 1월 2일 재임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50세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회정동[평화로 1597번길]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12년(광해군 4) 묘역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회백색 화강암으로 만든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은 기왓골, 처마 밑 서까래 등이 또렷하다. 비문은 이조 참판 송지(宋祗)가 짓고, 글씨는 동지돈녕부사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전액은 한성부 판윤 김상용(金尙容)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