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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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拓基 |
이칭/별칭 | 전보(展甫),지수재(知守齋),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정덕 |
[정의]
양주목사를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증조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 유성증(兪省曾)이고, 할아버지는 대사헌 유철(兪㯙)이며, 아버지는 목사 유명악(兪命岳)이다.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다. 아들은 유언흠(兪彦欽), 유언현(兪彦鉉), 유언전(兪彦銓), 유언수(兪彦銖)이다.
[활동 사항]
유척기(兪拓基)[1691~1767]는 1714년(숙종 40)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된 후 정언, 수찬, 이조 정랑,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왕의 아우였던 연잉군(延礽君)[후의 영조]의 세제(世弟) 책봉을 허락 받기 위해 책봉주청사(册封奏請使) 이건명(李健命)의 서장관을 맡아 1721년(경종 1)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일어난 신임사화로 소론이 집권하자 노론 4대신 가운데 한 명이었던 유척기는 소론파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에 유배되었다가 동래로 옮겨져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이조 참의로 복직하여 대사간, 승지 겸 참찬관 경상도 관찰사, 양주목사, 함경도 관찰사, 도승지,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세자시강원 빈객(世子侍講院賓客), 평안도 관찰사, 호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39년(영조 15) 8월 우의정에 오른 유척기는 신임사화 때 세제 책봉 문제로 화를 당한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의 복관(復官)을 건의하여 신원시켰다. 더불어 신임사화의 주축이었던 좌의정 유봉휘(柳鳳輝), 영의정 조태구(趙泰耉)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조관빈(趙觀彬), 김진상(金鎭商), 이기진(李箕鎭) 등도 유척기에 동조하여 벼슬을 내놓았다. 임금이 수차례에 관직을 주며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유척기의 벼슬을 거두고 고향으로 쫓아 보냈다.
1743년(영조 19) 임금이 다시 간곡히 부르니, 조정에 나아가 어영청 도제조(御營廳都提調),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지냈고, 1755년(영조 31)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가 되었다. 1758년(영조 34) 8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경기도 관찰사 홍계희(洪啓禧) 등이 임금에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허물을 들추며 이간질한 죄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도 물러나 유척기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사도세자의 행실 문제가 불거져 1760년(영조 36) 김상로에게 다시 영의정 자리를 내주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옮겼다.
얼마 후 현직에서 물러나 퇴임한 관원에게 주는 봉조하(奉朝賀) 벼슬에 이어 나이 많은 문신을 위한 기관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용인으로 낙향하여, 민우수(閔遇洙)의 뒤를 이어 1764년부터 1767년까지 제29대 충렬서원 원장을 지냈다.
유척기는 노론이지만 온건파로,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적이었던 소론의 중심인물 이종성(李宗城)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천보와 같이 영조의 탕평 정치에 협력하였다. 창곡(倉穀)과 조세 등 경제 정책에 관심을 가졌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따라 세종 때 만들어진 도량형의 표준을 되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1740년(영조 16)에 채택되었다.
[학문과 저술]
유척기는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金石學)에 조예가 깊었다. 경주의 신라시조왕비(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萬東廟碑), 홍주[현 충청남도 홍성군]의 노은동선생유허비(魯隱洞先生遺墟碑), 순창의 삼인대사적비(三印臺事蹟碑), 풍덕[현 개성 판문군 지동]의 신의왕후제릉신도비(神懿王后齊陵神道碑)의 전액(篆額)을 남겼다. 저서로는 1878년(고종 15) 후손 유치익(兪致益)이 간행한 『지수재집(知守齋集)』 15권이 있다.
[묘소]
무덤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있다. 부인 평산 신씨와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유척기가 죽자 영조는 묘소의 사방 4㎞[10리]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렸다. 유척기의 유언에 따라 신도비는 세우지 않고, 스스로 묘갈을 남겼다. 그러나 묘갈의 내용이 빈약해 둘째 아들 유언현이 보완하여 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