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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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眞儉 |
이칭/별칭 | 중약(仲約),각리(角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정덕 |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약(仲約), 호는 각리(角里).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경직(李景稷)이고, 할아버지는 이정영(李正英)이며, 아버지는 이대성(李大成)이다. 어머니는 홍만용(洪萬容)의 딸이다. 형은 이진유(李眞儒)이다. 아들은 서예로 이름을 떨친 이광사(李匡師)이다. 증조할아버지 이경직은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의 형이다. 생부는 이만성(李晩成)으로 이대성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이진검(李眞儉)[1671~1727]은 1699년(숙종 25) 생원이 되었고, 1704년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대교, 사서,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외직으로 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소론 강경파였던 이진검은 1721년(경종 1) 동부승지로서 노론 이이명(李頤命)을 탄핵한 죄로 밀양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어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신임사화 때 노론 세력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중용되고 소론이 실각함에 따라 강진에 정배(定配)되어 1727년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진검이 실각한 후, 형 이진유도 노론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아주 먼 외딴 곳에 유배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중앙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당하던 중 죽었다. 형들이 연이어 당파에 희생되자 아우인 이진휴·이진급(李眞伋)·이진위(李眞偉)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터를 잡고 조선 후기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는 데 힘썼다. 숙종 대 강화도로 들어가 양명학을 연구한 이들을 후에 강화학파(江華學派)라 하였는데, 이진검의 아들 이광사 등 후손들은 강화학파를 계승 발전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진검은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아들 이광사와 함께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학문과 저술]
일본에 반출된 정기수 묘비(鄭騏壽墓碑)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에 있는 강사상 신도비(姜士尙神道碑)[1713년]의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백성들이 이진검의 선정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716년(숙종 42)에 이진검 불망비(李眞儉不忘碑)를 건립하였다. 불망비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 관아지에 다른 양주목사 송덕비들과 함께 모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