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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89
한자 尹根壽
이칭/별칭 자고(子固),월정(月汀),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손광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7년연표보기 - 윤근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58년연표보기 - 별시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
활동 시기/일시 1562년연표보기 - 과천현감,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65년연표보기 - 홍문관부교리, 이조좌랑, 이조정랑
활동 시기/일시 1566년연표보기 -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직제학, 부승지, 우승지, 전시 시관,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첨지중추부사
활동 시기/일시 1573년연표보기 - 주청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파직
활동 시기/일시 1589년연표보기 - 명에 가서 종계를 바로잡은 『대명회전』을 받아 옴
활동 시기/일시 1590년연표보기 - 해평부원군에 책봉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삭탈관직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예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좌찬성
활동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호성공신 2등에 책봉
활동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기로소에 들어감
몰년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윤근수 사망
사당|배향지 월정사 -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 산79-5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해평
대표 관직 좌찬성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사당이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증조할아버지는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이고, 할아버지는 사용(司勇) 윤희림(尹希林)이며, 아버지는 군자감 정 윤변(尹忭)이다. 어머니는 부사직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형은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윤두수(尹斗壽)이다.

[활동 사항]

윤근수(尹根壽)[1537~1616]는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후 승정원 주서, 춘추관 기사관, 봉상시 주부, 연천 현감 등을 지냈다. 1562년(명종 17)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사관에 재임하던 중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가 과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 부교리, 이조 좌랑, 이조 정랑을 지냈고 이듬해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로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직제학, 부승지, 우승지, 전시 시관(殿試試官), 동부승지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첨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주청 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 이후 최대 현안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명나라에 잘못된 이성계의 가계도를 고쳐 달라고 청하던 일]를 하고 돌아왔다.

1578년(선조 11)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로 재임할 때 형 윤두수와 조카 윤현(尹晛)의 뇌물 수수 사건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아 탄핵 후 파직당했다. 1589년(선조 22) 공조 참판 재임 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를 바로잡은 『대명회전(大明會典)』과 명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귀국한 뒤 형조판서·대사헌·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되자 윤근수도 형 윤두수와 함께 파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예조판서로 기용되어 선조를 모시고 피란하였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며 명과의 외교를 맡았다. 1595년 좌찬성에 오르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모시고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피란하였다. 이후 예조판서에 판의금부사까지 겸하였다. 1604년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廟號)를 조(祖)라고 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606년(선조 39) 기로소에 들어갔고, 1616년(광해군 8) 4월에 임금으로부터 우로(優老)의 대특전(大特典)을 받았다. 같은 해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근수는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당대의 거장(巨匠)으로 일컬어졌으며, 독특한 글씨는 영화체(永和體)로 불리었다.

[묘소]

경기도 장단(長湍) 임강현(臨江縣)에 장사 지냈다.

[학문과 저술]

이황(李滉)조식(曺植)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성혼(成渾)·이이(李珥) 등과 사귀면서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으며, 당시 명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양명학에 대해서 유해무익한 것으로 배척하고,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월정집(月汀集)』, 『월정만필(月汀慢筆)』, 『조천록(朝天錄)』, 『사서토석(四書吐釋)』, 『송도지(松都誌)』, 『한문질의(漢文質疑)』, 『마한사초(馬漢史抄)』, 『조경창수(朝京唱酬)』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윤감정변묘갈(尹監正忭墓碣), 상주의 윤연령부인박씨갈(尹延齡夫人朴氏碣), 양주의 이판서윤경묘비(李判書潤慶墓碑) 등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당인 월정사(月汀祠)경기도 양주시 옥정동 776-2번지에 있다. 오래 전 건물은 불타 버리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가 1990년 10월에 다시 지었다. 삼문의 솟을대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대문 양쪽에 붉은 벽돌담을 둘렀다. ‘문정문(文貞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삼문을 통과하면 본당인 사당이 나온다.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처마에는 윤근수의 호를 따서 지은 ‘월정사(月汀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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