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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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殷瓚 |
이칭/별칭 | 이은찬(李殷贊),이언찬(李諺瓚),이헌찬(李憲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명환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이은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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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의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2월 - 임진강 의병 연합 부대 편성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7월 7일 - 계평리 싸움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월 19일 - 연평도 일본군 파견대 기습 공격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2월 27일 - 양주군 북방 석우리 전투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3월 31일 - 용산역에서 체포됨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5월 10일 -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09년 6월 16일 - 이은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10월 27일 -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
활동지 | 강원도 원주 |
활동지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석우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214] |
추모비 |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 - 강원도 원주시 학성2동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의병장 |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이은찬(李殷贊)·이언찬(李諺瓚)·이헌찬(李憲瓚)이라고도 한다. 종실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석하이고 동생은 이은호이다.
[활동 사항]
이은찬(李殷瓚)[1878~1909]은 강원도 원주군 부흥사면[현 원주시 판부면]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생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경상북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했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홍천(洪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이끌었다.
이은찬은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이구재(李九載)[본명은 이구채]와 더불어 활약하며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의병 500명을 모집한 뒤 경상북도 문경의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갔다. 당시 이인영은 문경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을미사변 후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은찬은 이재구와 함께 이인영에게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면서 나흘 동안 간곡히 기병(起兵)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인영이 이를 받아들이자 대장으로 추대한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응모자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이후 이은찬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砥平)·춘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는 데 진력하였으며,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에 격문을 띄워 11월에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드디어 의병들이 양주에 집결하자 13도 의병 연합 부대를 조직하여 이인영을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으로 추대하고 이은찬 자신은 이인영의 중군대장이 되었다.
13도 의병 연합 부대는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동대문 밖 12㎞[30리] 지점까지 근접하였다. 그러나 지도부 간 의견 차이와 1908년 1월 말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지휘권을 군사장[참모장] 허위(許蔿)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돌아감에 따라 결국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은찬도 하는 수 없이 휘하의 남은 병력 500명을 거느리고 양주로 퇴진하여 2년 동안 머물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각지에서 일본 수비대와 싸웠다. 대표적인 전투는 1908년 7월 7일의 계평리 싸움과 1909년 2월 27일의 양주군 북방 석우리 전투였다.
1908년 12월 이은찬은 양근·포천 쪽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와 손을 잡고 임진강 의병 연합 부대를 편성하여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크게 위세를 떨쳤다. 또한 농민 출신 의병장 김수민(金秀敏) 의병 부대와도 협력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말 허위와 김수민이 순국한 후 의병 부대는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200명 내외의 규모로 나뉘어 양주·포천·영평·연천·삭녕·금천·배천·연안 등지에서 전과를 거두었다.
이은찬은 민폐를 없애는 데에도 힘써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구입품에 대한 대금 지불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이행하였고, 군량·군자금을 마련할 때에는 직접 가난한 백성들로부터 거두지 않고 각 면장·동장에게 통고해 거두도록 하였다. 또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등 지방민에게 환심을 사 사람들은 의병을 위하여 보초도 서 주고 관헌의 동정을 살펴서 알려 주는 등 의병 활동을 지지, 옹호하게 되었다.
1909년 1월 초 일제의 압력이 심해지자 이은찬 의병 부대는 연안·청단역 사이로 빠져 남쪽의 연안 도서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1월 19일 밤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탄 의병들은 연평도 일본군 파견대를 기습 공격하고 증산도(甑山島)로 후퇴하였다. 이때 이근수(李根守) 등 46명이 순국하였다.
1909년 2월 27일 이은찬은 양주군 북방 석우리에서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容大) 등 약 3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힌 만큼 의병 또한 수십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이은찬은 3월 의병 부대를 해산했으며, 대신 만주 북간도로 들어가 군사를 양성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때 서울의 밀정이었던 박노천(朴魯天)·신좌균(申左均) 등이 이러한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금 제공을 미끼로 하여 이은찬을 서울로 유인하였다.
모략에 빠진 이은찬은 1909년 3월 31일 서울 용산역에 나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은 이은찬은 일본인 판사 와타나베의 회유를 물리치고 재판정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16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의 심경을 담은 우국 시조(憂國時調) 한 수가 옥중시로 전한다.
일지이수작위선(一枝李樹作爲船)[오얏나무 한 가지로 배를 만들어]
욕제창생박해변(慾濟蒼生泊海邊)[만백성 건지고자 바다에 배 띄었다가]
수공미취신선닉(守功未就身先溺)[품은 뜻 못 이루고 내 몸 먼저 빠지니]
수산동양낙만년(誰算東洋樂萬年)[뉘라서 동양의 평화를 기약한단 말인가]
[묘소]
유해는 심복 부하인 박찬문이 거두어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현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68년 10월 27일 강원도 원주시 학성2동에 이은찬 의병장 추모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