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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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學堂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내촌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도남 |
개교 시기/일시 | 1931년 5월 - 농벗학당으로 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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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 시기/일시 | 1950년대 - 6·25 전쟁 이후 자연 폐지 |
최초 설립지 | 농벗학당 -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내촌마을 |
성격 | 근대 교육 기관|야학당 |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인재 양성과 농촌 계몽 운동의 실천’이라는 목표 아래 양주군 회천면 일대의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변천]
1929년 늦가을 남진희의 제의로 정귀현의 집에 개설된 야학방에 뜻 있는 동네 사람들이 후원하여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1931년 5월 서울기독교청년회 총무인 버나드와 농촌 계몽 지도자 홍병선·김기창·황영수 등의 후원으로 79.34㎡[24평]의 교실에 농벗학당을 개교하였다. 당시 교사진으로는 윤익선, 이형자 외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의 이귀남,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주휘순, 박복진, 일본 유학생 김원순 등이 있었다. 남자는 물론 쪽을 찐 부인들도 앞을 다투어 출석하였는데, 농벗학당은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경제 자립과 독립 정신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해방 후 농벗학당은 덕정국민학교 봉양분교로 변하였다가 6·25 전쟁 이후 자연 폐지되었다.
당시 학당 비치 용품으로는 농벗학당을 상징하는 깃발도 있었고, 무게가 75㎏[20관]이나 되는 큰 종을 45원[당시 큰 소 한 마리에 60원]을 들여 마련하기도 하였다. 종은 1960년까지 보관되다가 도난당하였고, 교실은 8·15 해방 이후 덕정국민학교 봉양분교로 사용되었다.
2011년 현재 농벗학당과 관련된 기록물은 양주시 봉양동에 거주하는 이상의[84세]가 보관하고 있으며, 학당을 상징하던 농벗학당기는 양주시 봉양동의 이용문[54세]이 보관하고 있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작사 윤익선/작곡 이형자]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 동산/ 밤나무 우거진 내촌에/ 장하고 묘하게 우뚝 솟은/ 농벗야학당이 새로 생겼네/ 농벗 농벗 야학당 아름다움은/ 세계 문명 받아서 배워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