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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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澤鎭 |
영어공식명칭 | Kim Taek-jin |
이칭/별칭 | 원중(源仲),동려(東黎)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 김택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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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택진 독립청원서 서명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김택진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 선임 |
몰년 시기/일시 | 1961년 - 김택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택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택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거주|이주지 | 김택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택진(金澤鎭)[1874~1961]은 1919년 3월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신간회 영주지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가계]
김택진의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원중(源仲), 호는 동려(東黎)이다. 문절공 김담(金淡)[1416~1464]의 17세손이며,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김경규(金慶奎)이다. 김택진은 1874년 2월 16일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가흥면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김택진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였고, 명망 있는 여러 유학자와 교유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로 통분하던 중 김창숙(金昌淑)[1879~1962]을 중심으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이 전개되자 참여하였다. 유림단의 유림대표들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해서 보냈는데, 영주 지역에서는 김택진을 비롯해 김동진(金東鎭)[1867~1952]·정태진(丁泰鎭)[1876~1960] 등이 함께 서명하였다. 이 의거를 독립청원운동 또는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하는데,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한 명실상부 유림단의 독립운동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내용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 광무황제의 독살 및 한국 국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주장하는 것이었다. 「독립청원서」는 유림대표 김창숙이 상하이를 거쳐 파리로 가져가려 했으나, 사정이 어려워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1881~1950]에게 우송되었으며, 각국 공사관과 국내의 각 향교에도 발송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2일 성주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곽종석을 비롯한 독립청원운동 관련자들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김택진도 이때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1927년 12월 신간회 영주지회의 제1회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택진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