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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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略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용철 |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서 유배를 살다 숨을 거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생애.
[개설]
단종(端宗)[1441~1457]은 이름이 홍위(弘暐)이고 조선 제5대 임금 문종(文宗)[1414~1452]의 외아들이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이며,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출생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세종 32) 7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 18일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의 죽음과 신권의 강화]
문종은 유명(遺命)으로 황보인(皇甫仁)[?~1453]·김종서(金宗瑞)[1383~1453] 등 세종대 이래 재상을 지내던 대신들에게 단종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김종서 등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재상 합의체인 의정부의 권한 역시 국왕과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 기관의 임무와 기능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는 왕실 종척(宗戚)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종척들은 신권(臣權)의 지나친 강화와 왕권(王權)의 지나친 약화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종의 2남이자 문종의 아우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까지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 신권을 대표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또 자신에 반대하는 대군(大君) 중 가장 큰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마저 강화로 축출한 뒤에 사사(賜死)하였다. 직후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 여러 중직을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국정 동력의 상실과 왕권 양위]
이 같은 배경에서 단종은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동력을 급격히 상실하였다. 수양대군의 압박으로 인하여 자신을 보위하던 측근마저 지킬 수 없었다. 실제 단종은 수양대군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455년 윤 6월,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 양씨를 청풍(淸風)으로, 상궁 박씨를 청양(靑陽)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삭녕(朔寧)으로, 한남군(漢南君)을 금산(錦山)으로, 영풍군(永豊君)을 예안(禮安)으로, 정종(鄭悰)을 영월로 각각 귀양 보내었다. 이어 조유례(趙由禮)[?~1455]는 벼슬을 거두어 가두고, 이어서 1455년 6월 19일에는 금성대군을 광주(廣州)로 이배하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수양대군 일파의 겁박에 의하여 더 이상 왕위를 보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가운데 선위를 결정하였으며, 1455년(단종 3) 윤 6월 11일 경회루에서 수양대군에게 대보(大寶)를 전달하고 양위하였다.
[세조의 즉위와 상왕복위운동]
제7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조(世祖)[1417~1468]는 형식적으로나마 단종을 우대하였다. 단종은 1455년 7월 11일 공의온문태상왕(恭懿溫文太上王)이 되었지만, 이 같은 대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단초를 연 것은 1455년 10월부터 1456년 6월 1일까지 전개된 ‘상왕복위운동(上王復位運動)’이었다.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등 집현전 학사 출신 신하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 환영식장에서 세조 제거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뒤이어 거사에 참여하였던 김질(金礩)[1422~1478]이 전말을 고발하면서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 화가 단종에게까지 미쳤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사전에 이를 알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 청령포(淸泠浦)에 안치된 것이다.
[청령포 유배]
결국 단종은 1456년(세조 2) 6월 22일 한양에서 400여 리나 떨어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단종은 나이는 어리지만,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군주로서 의젓함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유뱃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단종이 낡은 남녀[덮개가 없는 의자 형태의 가마]를 타고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나갈 때 도성의 백성들은 울며 전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별하던 백성들이 관노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단종은 종묘에서 어머니 현덕왕후의 위패가 불태워지는 모욕을 당하고는 조석을 폐하기도 하였다.
귀양 행렬은 한양을 출발하여 광주, 여주, 원주, 부론, 주천을 거쳐 한양을 떠난 지 7일 만인 1456년 6월 28일 영월 청령포 적소(謫所)에 도착하였다.
청령포의 단종 처소는 세 채의 뒤방집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그중 한 채에 단종과 궁녀가 장지를 사이로 하여 거처하였고, 남은 집에는 단종을 지키는 군졸들이 살았는데, 군졸이 20명, 궁노가 10명, 눈을 피하여 뒤쫓아 온 궁녀 6명, 내시 1명 등 모두 40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 집에서 살았다.
처음 단종이 도착하였을 때는 한 사람의 궁녀도 없었는데,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6일 지나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 네 명은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따르고, 여섯 명은 서울에서 영월까지 옛 주인을 따라왔던 것이다. 당시 세조는 이 일을 알았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종을 따르는 이들은 궁녀와 궁노뿐만이 아니었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하자 어떤 이는 남몰래 맑고 시원한 냇물을 떠다 올렸고, 어떤 이는 산딸기를 따다 바쳤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밤중에 모깃불을 피워 놓기도 하였다.
[단종의 유배 생활]
단종은 청령포에서 거처하는 동안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가 고궁을 그리며 산기슭에 홑어진 돌을 주워 모았다. 이것이 지금의 망향탑이다. 망향탑은 그 후 300여 년간 잘 보존되다가 근래 허물어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4년 군수 김명한(金明漢)의 주선으로 다시 복원된 것이다.
청령포에 거주하던 단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수를 만났으며, 그로 인하여 처소를 읍내 영월 객사의 동헌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듬해인 1457년부터는 관가의 감시도 다소 완화되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다소간 연민의 정을 느꼈고, 이런 맥락에서 강원감사 김광수(金光粹)에게 명하여 단종을 후하게 대우하라고 지시한 가운데 내시부 우승지 김정(金精)을 영월에 파견하여 안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실제 세조는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를 폐하고 단종마저 영월로 내쫓은 후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단종의 관풍헌 생활은 평온하였다. 단종은 마음이 산란하거나 심사가 울적할 때 퉁소 부는 이를 데리고 관풍헌 앞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달을 바라보면서 퉁소 소리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457년(세조 3) 9월, 순흥에서 금성대군에 의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8대군 가운데 유일하게 단종의 편에 섰던 여섯째 금성대군 이유(李瑠)는 1456년 6월 상왕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 후속 조치로 6월 27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금성대군은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여 순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하자 그 여파가 다시 단종에게 드리우게 되었다. 단종은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안동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금성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이냐?”라며 밤을 새워 울었다. 이윽고 단종은 자신을 따르던 시녀와 종인 등 측근에게 각자 갈 곳을 택하여 가고 싶은 대로 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모두가 단종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맹서하며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단종의 죽음]
세조의 측근들인 정인지(鄭麟趾)[1396~1478], 신숙주(申叔舟)[1417~1475], 한명회(韓明澮)[1415~1487]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종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의정부와 종친부(宗親府), 충훈부(忠勳府) 및 육조 등과 합세하여 연명으로 “노산군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살려 두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국법으로 다스리려야 한다”라고 계속 상소를 올렸다. 이와 관련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 1457년(세조 3) 10월 21일 자 기사에는 단종의 최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魯山聞之 亦自艦而卒 以禮葬之(노산문지 역자액이졸 이예장지)”라고 하여 단종의 죽음을 열세 자로 간략히 처리하고 있다. “노산군이 소식을 듣고는 역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는 것이다.
물론 단종이 죽은 날은 21일이 아닌 24일이었다. 정조(正祖)[1752~1800]의 명으로 1797년 간행된 관찬(官撰) 『장릉사보(莊陵史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24일에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금부도사가 대답을 못 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단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통인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다. 단종이 항상 객사(客舍)에 있으므로, 촌백성들로서 고을에 오는 자는 언제나 누(樓) 아래로 와서 단종을 뵈었는데,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단종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관가께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단종이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다. [『영남야어(嶺南野語)』]. 엄흥도는 영월군 사람으로 호장(戶長)[아전의 우두머리]이었는데,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유시[오후 5시~7시]에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세조의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엄흥도가 혼자서 임곡(臨吳)하고 이튿날[을묘],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았던 옻칠한 관(冠)을 가져다 본군 북쪽 5리 밖 동을지로 모셔가 서둘러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투어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기를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라고 하고 매장을 마치고 나서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홍재전서(弘齋全書)』].”
결국 단종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오후 5~7시 사이에 영월 객사의 동헌인 관풍헌에서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였고, 상왕위에 있은 지는 2년째 되던 해였다.
[추복과 장릉]
단종은 1681년(숙종 7) 7월 21일 노산군에서 노산대군으로 추봉(追封)되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에는 추복(追復)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였으며,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에 부묘(祔廟)하고 능호(陵號)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지 241년 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능은 영월 북쪽 동을지 신좌(辛坐)에 있고, 표석(表石)이 섰으며,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다. 장릉은 현재 발산(鉢山)에 있는데, 발산은 영월의 진산(鎭山)이다. 영월 시가지에서 북서쪽으로 올려다보면 산의 모양이 삼각형으로 보여 영월에서는 일명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부른다. 6년 뒤인 1704년(숙종 30)에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실록(端宗實錄)』이라 표제를 바꾸고, 아울러 그간의 경위를 적어서 책 뒤에 부록으로 붙였다. 1782년(정조 6)에 대왕에 대한 보감(寶鑑) 한 권을 엮어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