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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천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0528
한자 險川戰鬪
영어음역 Heomcheon Jeontu
영어의미역 Heomcheon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재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636년 1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36년 1월 2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기도 용인군 험천현
관련인물/단체 정세규|김홍익|이경징|이상재|이의배|최진립

[정의]

1636년 1월 2일 경기도 용인에서 충청도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싼 청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 조정은 강화도-한성-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거점 방어를 하여 청군을 격퇴할 것을 구상하고, 이 거점들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는 한편, 각도 첨사·병사에게 근왕(勤王)을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비빈(妃嬪)·왕자·종실 및 백관(百官)의 가족을 강화도로 이동시키고 국왕도 강화도로 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국왕이 강화도에 들어가기 전인 12월 14일에 청군 선봉부대가 한성 근교에 진출하여 한성-강화도 간의 통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로써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된 국왕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에 들어가 장기 농성에 돌입하였다. 청군은 곧바로 조선 국왕 일행을 추격하여 12월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국왕은 각도 감사·병사에게 조속히 근왕군을 이끌고 수도권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발단]

12월 18일 국왕의 근왕 명령을 받은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는 공주에 7,000여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이때 나성현감 김홍익(金弘翼), 남포현감 이경징(李慶徵), 금정찰방 이상재(李尙載) 등이 각자의 고을에서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정세규는 12월 25일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의 선봉군을 공주-천안-수원의 경로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도록 한 다음,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 수도권으로 진군하였다. 1월 2일 충청도 근왕군은 남한산성 남방 40리 지점인 경기도 용인군 험천현에 당도하였다. 이때 청군 좌익군 7,000여 명이 험천현 북방 20리 일대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경과]

충청도 근왕군이 험천현에 진출하자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는 병력을 험천현 서방의 3229고지에 진출시켜 근왕군을 공격하였다. 청군의 기세에 놀란 충청병사 이의배는 단신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러나 김홍익·이경징·이상재 등은 청군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전투는 이날 종일토록 10여 차례나 거듭되었다. 충청도 근왕군은 돌격을 감행하는 청군에 총포 사격을 집중하여 번번이 공세를 저지하였다.

[결과]

해질 무렵부터 조선군 진영에는 탄약과 화살이 고갈되어 근왕군은 마침내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기도 수원시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김홍익·이경징·이상재 등 수령들이 전사하고 태반이 넘는 병력을 상실하였다. 한편 최진립(崔震立)도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였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근왕군은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청군과 정면에서 일전을 펼침으로써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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