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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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에서 활동한 청풍부사 김수증의 문집. 김수증(金壽增)[1624~1701]의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곡운(谷雲), 자는 연지(延之)이다.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흡(金昌翕)이 편차를 정하고 서문을 쓴 초고를 손자인 김치겸(金致謙)이 경상도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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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현감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회(思晦). 아버지는 부사 김상관(金尙寬)이고, 작은아버지인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양자로 들어갔다. 아들로 김수흥(金壽興)과 김수항(金壽恒)을 두었다. 김광찬(金光燦)[1597~1668]은 제천 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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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청풍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며, 아버지는 제천 현감과 청풍 군수를 역임한 김광찬(金光燦)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동생이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은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1652년(효종 3)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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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부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며,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딸이다.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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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간행된 이의건의 문집. 이의건(李義健)[1533~1621]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이다. 세종(世宗)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이한(李漢)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고 공조정랑(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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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서 간행된 김류의 문집. 김류(金瑬)[1571~1648]의 본관은 순천이며,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이다. 인조반정의 주역이며 공신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김류는 수천 편에 달하는 시문을 남겼지만 전란을 거치면서 유실되었고 손자인 김진표(金震標)가 청풍부사로 재직할 당시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 등의 산정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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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에서 우거한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보(德甫), 호는 개산(皆山). 할아버지는 사간원 정언 유격(柳格)이며, 아버지는 사옹원 시정 유시회(柳時會)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길(權吉)의 딸이다. 유석(柳碩)[1595~1655]은 1613년(광해군 5) 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2)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사간원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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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에 은거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초(善初), 호는 화암(花巖).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이우춘(李遇春)이다. 이숙(李俶)[1568~1645)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였으며, 음서로 찰방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서궁 유폐 등 광해군이 패륜을 저지른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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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 증조할아버지는 조응두(趙應斗), 할아버지는 조충(趙冲)이며, 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조정호(趙廷虎)이고, 어머니는 군수 심은(沈訔)의 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부인은 부윤 민기(閔機)의 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백운에 자리 잡은 민광훈(閔光勳)과 처남 매부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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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에서 간행된 조선 전기 문인 이춘영의 문집. 이춘영(李春英)[1563~1606]의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실지(實之), 호는 체소재(體素齋)이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아들 이시재(李時材)가 집에 소장했던 유문을 편집하고 1626년 신흠(申欽)이 교정을 보고 또 서문을 써서 간행을 준비했으나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