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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2002
한자 月岳山-歷史-激戰地松界
영어의미역 Historical Songgye Battle Field of History in the Woraksan Mounta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35년 무렵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54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56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00년대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0년대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1980년대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연표보기
고개 닷돈재
월악산
구래골|상시골|정번데기골|안홍골
마을 송계리|황강리|몽챙이
산성 제천 덕주산성
사찰 덕주사
문화재 덕주사 마애불|월악산 신당|명성황후 별궁터
학교 한송초중학교
빨치산굴

[월악산 아래 자리한 마을]

송계리제천시 한수면의 면소재지다. 한수면사무소는 원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공사로 인해 1984년 6월 송계리로 이전하였다. 제천에서 충주 수안보 방향으로 청풍호를 끼고 가다가 월악교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자락에 송계리가 위치한다. 또 충주 수안보에서 제천 방향으로 닷돈재를 넘어 송계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치마바위의 모습을 드러낸 동양화 같은 산록이 계곡 양쪽으로 전개되고, 이어 송계리의 모습이 보인다. 송계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월악산을 뒤로한 송계리의 모습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보기 드문 빼어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송계리는 비록 행정 구역은 제천시에 위치하고 있지만, 실제 생활권은 충주시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제천시와는 거리가 멀다. 송계리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540여 년 전으로, 괴산 피씨(槐山皮氏)가 마을 입구인 ‘몽챙이’에 들어오면서부터다. 마을 이름은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내가 흐른다고 해서 ‘송계동’이라 부르다가 훗날 ‘송계리’로 변했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는 동창마을[東倉마을]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동창’이란 조선 시대 남한강 수로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가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열두 동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송계리에 자연 마을이 열두 개가 있기 때문이다. 송계리청풍호를 가까이 접하고 있는 전형적인 산간 농촌 마을로 주로 고추와 마늘, 담배, 양파, 고본주 등을 생산하고 있다.

송계리 주민들은 마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항상 ‘월악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습관처럼 ‘월악산 송계리’라고 할 정도다. 그만큼 ‘월악산’은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 송계리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월악산은 때로는 전란의 ‘격전지’이기도 했고 ‘피난지’이기도 했다. 한국 역사의 흐름, 특히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많이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월악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송계리 주민들의 삶에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덕주공주와 명성황후가 택한 은거지]

송계리에는 통일 신라 시대에 쌓았다는 제천 덕주산성(德周山城)의 남문, 북문, 동문 등의 성문과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월악산 정상을 중심으로 네 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제천 덕주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와 경상북도 문경시를 있는 옛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충주나 제천 방향에서 송계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제천 덕주산성 성문과 성곽들이다. 마을 뒤로 산세가 험한 월악산이 위치해 있고, 이들 성문과 성곽이 마을 입구에 서 있기 때문에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까지도 준다. 월악산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이들 성곽 체제는 송계리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중원 지역에서 이만한 은신처도 없을 듯싶다.

송계리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이곳 월악산을 처음으로 ‘은신처’로 택한 사람은 바로 덕주공주(德周公主)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경순왕의 큰딸 덕주공주송계리로 들어온다. 그녀는 아버지 경순왕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넘겨주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송계리 인근에 있는 문경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관세음보살이 보였다. 관세음보살은 덕주공주에게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西天)에 이르는 큰 터가 있는데, 그곳에 불사를 하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마애불을 세워라.”라고 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 생각한 남매는 계곡 물에 목욕 재개를 하고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 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불사를 하고, 마애불을 조각하며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는데, 그곳이 바로 송계리에 있는 덕주사다.

덕주공주송계리에서의 삶에 만족했지만, 왕권을 계승하지 못한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마의태자는 동생인 덕주공주의 만류에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금강산을 향해 떠난다.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져 혈혈단신이 된 덕주공주는 불교에 입문한 후 경순왕의 애틋한 부정을 그리워하고, 마의태자의 건승을 기원하며 일평생을 송계리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명성황후송계리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송계리에는 한송초중학교가 위치해 있다. 일반적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송계리에는 학생 수가 적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다. 한송초중학교로 들어서면 집의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 10여 개가 눈에 들어온다. 이 주춧돌이 명성황후 별궁을 짓는 데에 사용했던 주춧돌이라고 이야기한다. 마을 주민들은 그곳을 ‘명성황후 궁터’라고 부른다.

명성황후송계리에 별궁을 짓고, 그곳에서 기거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지에서 거둔 대동세를 재원으로 각도의 목수, 석수, 와공을 동원하여 별궁을 지었지만 일본군에게 ‘시해’되면서 별궁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결국, 별궁은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순차적으로 헐려서 예전 충주군청과 인근 지역 학교를 짓는 데 목재로 사용되고, 현재와 같이 주춧돌만 남게 된 것이다. 마을 어른들 중 몇 분은 지금도 별궁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준 월악산신]

월악산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신령스러운 산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이미 신라 시대부터 소사(小祀)의 대상으로 지정되어 국가의 주도로 제사가 거행되었다. 사람들이 월악산신의 영험함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다가 실패하여 물러난 후, 몽골군이 1254년(고종 41) 9월과 1256년(고종 43) 4월 두 차례에 걸쳐서 충주성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충주성 공략에 실패한다. 몽고군은 충주에서 물러나 제천 덕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충주와 월악산 일대의 피난민들이 제천 덕주산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제천 덕주산성이 있는 월악산은 오랜 옛날부터 인근 사람들에게 피난지로 이름나 있는 곳이었다.

몽고군이 제천 덕주산성으로 물밀 듯 몰려 왔다. 그런데 별안간 안개가 끼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스럽게 일어나더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제천 덕주산성을 공격하던 몽고군은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여 세찬 번개와 천둥 그리고 비바람에 넋을 잃고,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를 ‘월악산신(月岳山神)’이 노한 것이라고 생각한 몽고군은 겁을 먹고 더 이상 어떻게 해 보지 못하고 문경 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高宗)은 신묘(神廟)에서 “월악산신의 도움으로 몽고군을 물리쳤다.”라고 하면서 산천의 신령(神靈)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월악산신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피난민들의 모습은 송계리 지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한 부대가 순식간에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신립(申砬) 장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도 충주와 월악산 주변에 살던 주민들은 제천 덕주산성으로 난을 피해 몰려들었다. 그 피난민들 가운데 ‘구씨’라는 사람은 현재의 ‘구래골’에, 홍씨는 ‘상시골’에, 정씨는 ‘정번데기골’에서, 피씨는 ‘안홍골’에서 각각 피난을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도 왜군들은 제천 덕주산성만은 건드리지 못하였으므로 피난민들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송계리 주민들에게 월악산은 천연의 요새이자 피난처이면서 오랜 세월 신령스러운 영험함이 존재하는 곳이다. 현재 월악영봉 아래에는 월악산 신당이 자리하고 있다. 월악산신의 도움을 받고 산다고 여기는 송계리 사람들은 매년 음력 1월 10일과 10월 10일 오후에 월악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신당과 거기에서 행해지는 제사는 바로 이러한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에 함께 대항한 제천 의병과 동학 농민군]

제천은 개항기 을미 의병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이자 가장 치열하게 의병 활동이 전개된 곳이기도 하다. 제천시 봉양읍 장담마을은 의병의 터전이 되었으며, 유인석(柳麟錫)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곳도 바로 제천이다. 특히 송계리는 개항기 제천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호좌의진의 유격장인 이강년(李康秊)이 이곳에 한 달 가까이 머물면서 충주 수안보와 조령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던 전진 기지였다. 월악산에 은거하던 의병들은 송계리를 비롯해서 미륵리, 월악리, 억수리를 옮겨 다니며 활동했다.

한편, 동학 농민 운동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성두환(成斗煥)[1845~1895]의 출신지는 송계리로 알려져 있다. 송계리를 중심으로 충주 일대에서 활동한 성두환은 1893년(고종 30) 청풍 대접주로서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으며, 1894년(고종 31)에는 충청북도 제천·단양을 대표하는 ‘동학 집강’이 되었다. 그는 충주에서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앞으로 왜놈이 도처에 가득 찰 것이다.”라고 하면서 근처 마을마다 다니면서 곳곳에 보루(堡壘)를 쌓았다.

그는 아직도 송계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송계리에 거주하고 있는 석근영[남, 1930년생]에 따르면, 성두환은 모든 사람이 존경할 정도로 인품이 있고 늠름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두환이 동학 농민군을 이끌 당시 송계리에 살았던 석인문, 석인순, 이금철 등은 그에게서 ‘화총’을 지급 받았다. 석인문은 당시 ‘통장’이라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석인순은 성두환을 도와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했는데, 당시 3천 냥과 소 일곱 마리를 내어 주고 식량 등을 지원하였다. 성두환은 월악산에서 활동하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며, 강원도 평창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에 맞서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결국 성두환은 1895년(고종 32) 전봉준(全琫準) 등과 함께 서울에서 효수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동학군과 의병군들에게 자금을 주었거나 협조한 사람을 처벌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석인순은 선대 산소가 있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53번지를 빼앗겼으며, 40세의 나이에 억울하게 숨을 거두었다. 현재 석근영은 당시 사용했던 ‘궤’와 ‘칼’을 보관하고 있다. 한편, 이금철이 사용했던 화총도 그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마을 주민 최대춘의 실수로 그만 잃어버렸다고 한다. 석근영은 성두환의 활동은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증조부인 석인순 등의 활동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을 매우 아쉬워했다. 마을에 성두환의 후손과 이금철의 후손도 살고 있으나, 그들의 기억 속에 그분들의 활동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서북청년회에 맞서다 빨치산이 된 마을 청년들]

1945년 8·15 광복이 되면서 송계리 골골마다 태극기요, 거리마다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송계리 사람들은 “여기 사람들 말도 못합니다. 뭔지 몰라요. 농촌 사람이 어떻게 알아요.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도 못 다녔어요.”라는 석근영의 말처럼 그러한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양상은 1946년 봄으로 넘어가면서 ‘신탁 통치 반대 문제’와 ‘식민지 시대의 유산 정리’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각종 청년 단체들이 난립하면서부터는 노골적인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송계리에 큰 변화가 온 것은 1946년 가을부터였다. 제천이나 충주에서 미군정에 반대하여 봉기했던 이들이 경찰의 체포를 피해 월악산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흔히 ‘야산대(野山隊)’라고 불렀던 이들의 입산은 송계리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이 송계리로 들어왔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말에 성립된 단체로, 북한 서북 지역에서 월남한 이들이 구성한 조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송계리에 들어온 그들은 ‘치안대’라고 쓴 완장을 차고 다녔다. 송계리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이 많았을 때는 12명 가까이나 되었다. 그들은 마치 점령군이라도 된 양 마을 청년들을 차례로 잡아 놓고 몰매를 놓으면서 “개를 잡아내라!, 닭을 잡아내라!” 하면서 닦달을 했다.

서북청년단원들은 마을에서도 잘사는 집에서 주로 거주를 했는데,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집주인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매질을 했다. 송계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접해 주고 오히려 매질을 당한 셈이다. 결국 매질을 이기지 못해 산으로 도망치면 ‘빨갱이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가족을 잡아다 구타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맞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빨갱이’라는 소리만은 듣지 않았으면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북청년단은 송계리 사람들과 점차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서북청년단 사람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져 갔다. 송계리 청년들이 외딴집에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외딴집에 불을 지르면서 사상을 떠나 마을 청년들과 대립이 되었다. 결국 횡포를 견디다 못한 마을 청년들 일부가 서북청년단을 피해 월악산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들 마을 청년들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성두환의 손자 성민헌(成敏憲)과 ‘월악산 중대장’으로 알려진 주영근 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앞서 입산한 ‘야산대’와 함께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빨갱이로 몰린 마을 사람들]

송계리 구장 집에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구장과 안면이 생기자 구장으로 하여금 공산당 입당 원서에 도장을 찍게 하였다. 또한, 그는 마을 주민들의 도장을 임의로 사용해서 공산당 입당 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의 개인 도장을 구장 집에서 모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장을 찍어 준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빨치산’ 토벌대들이 덕산면 물고리의 숯가마 안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장이 찍힌 공산당 입당 원서를 발견하였다. 그 후 마을 주민들은 빨치산으로 몰려 토벌대와 경찰들에게 많은 폭행을 당했으며, 제천경찰서 유치장에 가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초에 월악산 빨치산들이 한수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당시 월악산 빨치산들은 한수면장을 죽이고, 지서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멀리는 충주경찰서까지 습격하러 나서기도 하였다. 경찰은 송계리 주민들을 흩어지게 해서 빨치산의 지원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2개월여 동안 집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에서 마을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을 주민 일부는 산으로 도피한 일가친지의 안부를 걱정하여, 경찰 등 토벌대가 오면 재빨리 마당에 흰 옷가지를 내걸어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에서는 빨치산이 출몰하면 소재지의 경찰들에게까지 알려야만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곤혹스런 상황에 처해 있던 마을 주민들은 빨치산이나 토벌대 모두에 의해 ‘적과의 내통’이라는 죄목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해야 했다.

1948년으로 들어서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쪽으로 정세가 돌아가자 빨치산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서 한수면 일대에서는 밤중에 일제히 마을의 봉우리마다에서 횃불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선거에 참여하는 일은 좌익과 우익 간의 중요한 화제가 되었다. 대다수 주민들은 관의 지시에 따라 보평리에 있던 투표소로 향했다. 당시 마을 구장이었던 석수천은 마을 주민들을 인솔해 보평리로 투표하러 가던 중 복면을 하고 칼과 창을 든 빨치산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그는 빨치산과 맞서 싸우다가 다쳐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훗날 몸이 다 낫자 경찰이 되었으며, 송계리 파견대장으로 임명을 받기도 하였다.

[1980년대까지 따라다닌 ‘빨갱이’란 꼬리표]

분단의 역사가 두고두고 비극을 불러일으킨 곳이 바로 송계리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은 백두대간을 타고 재빨리 남하하여 송계리를 통해서 경상북도 문경을 점령하였다. 또한,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북한군이 퇴각 통로로 이용된 곳도 송계리였다. 휴전 협상이 길게 이어지면서 국군은 후방을 교란하고 있는 월악산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송계리에는 8사단 병력이 주둔하면서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런데 작전 지구 안에 살던 송계리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주둔군은 마을 주민들을 ‘통비분자(通匪分子)[공비들과 내통하고 있는 불순분자]’ 정도로 여기고 마구잡이로 구타하고, 심지어는 마을 처녀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송계리 사람들이 한수면 소재지에 나가면 ‘빨갱이’라고 놀림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집단 구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에서 자체 치안대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믿어 주지 않았다.

이때 빨치산은 월악산의 ‘개절이’나 ‘비야오골’ 등에 은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토벌대는 마을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들려 앞세우고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그들은 총을 들고 어슬렁거리면서 마을 주민들을 뒤따랐다. 빨치산의 은거지로 의심되는 곳이 있으면 마을 주민들을 그곳으로 먼저 밀어 넣었다. 만약 두려움에 떨면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하였다. 마을 주민 가운데 토벌대로 나섰다가 오히려 토벌대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송계리에는 제삿날이 겹치는 집이 여러 집 있다.

1980년대까지 송계리 사람들에게는 빨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석근영은 “참 억울하다. 시장에 가서 국밥도 돈 주고 못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라고 하면서, 그동안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말을 했다.

한수면사무소 부면장인 석석희는 “지금도 빨치산이라고 하면 얘기도 꺼내기 싫어하는 분들도 있어요. 정치적인 것으로 남한테 피해 준 분도 있고, 또 그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도 있고……. 어릴 때 싸우면, 너네 집안은 빨갱이 집안이다, 아니다 하면서 싸웠어요.”라며 어린 시절 상처받았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송계리 사람들은 정치나 사상을 몰랐다. 그러면서 빨치산에게 피해를 입고, 우리 경찰과 국군에게도 피해를 당한 것이다. 지금도 마을 어른들은 마을 사람들의 오명을 씻고 신원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빨치산 마을’이란 오명을 씻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마을 사람들이 받았던 상처는 생각보다 커 보였다. 마을 어른들은 정부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달래 주었으며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해 1년에 한 번이라도 제사를 지내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전란을 피하는 마을에서 관광 마을로 탈바꿈하다]

과거 송계리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전란이 있을 때마다 인근 지역에서 사람들이 몰렸지만,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송계리를 찾는다. 또한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한수면사무소가 송계리로 옮겨 오고, 월악산과 송계계곡을 둘러 남한강이 흐르게 되었다. 월악산 자락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에 산악인들이 송계리를 찾고, 월악산이 이루어 놓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계곡물로 인해 여름철 피서객들도 송계리를 찾는다. 또한 월악산 덕주계곡 안쪽에 덕주공주와 인연이 있는 덕주사가 위치하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이 기도를 위해 송계리를 다녀간다.

2011년 2월 24일 필자가 송계리를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모두 면사무소에 모여 있었다. 2010년 송계리 일부 지역이 국립공원 구역에서 해제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마을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설명회가 열렸다. 송계리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민박과 펜션, 식당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관심이 높았다. 송계리는 전란을 피하는 산촌 마을에서 관광 마을로 탈바꿈을 준비하고 있었다.

송계리 사람들은 2000년대에 와서 새로 월악산 산신당을 건립하고, 한수면 전체 주민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매년 월악산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월악산 자락의 석회암 지대에서 재배한 ‘송계양파’ 홍보를 위해 ‘양파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축제 기간에 송계리를 찾는 관광객들은 2,000여 명 이상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 주민들의 관심은 온통 관광객들에게 마을을 어떻게 알린 것인지, 관광객들이 송계리를 찾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데 있다. 이러한 관심들이 마을 사람들이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관광지’ 송계리를 가꾸어 가는 마음을 하나로 묶어 두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제천마을지』-금성·청풍·수산·덕산·한수면편(제천문화원, 1999)
  • 『제천시지』(제천시지편찬위원회, 2004)
  • 『제천을 위해 살으리라』(신월김학영선생문집간행위원회, 2007)
  • 인터뷰(송계리 주민 석근영, 남, 82세, 2011. 2. 14.)
  • 인터뷰(송계리 주민 석팔례, 여, 82세, 2011. 2. 14.)
  • 인터뷰(송계리 주민 석석희, 남, 80세, 2011. 2. 14.)
  • 인터뷰(송계리 주민 최대춘, 여, 80세, 2011. 2. 14.)
  • 인터뷰(송계리 덕주사 주지 원경, 2011. 2. 14.)
이용자 의견
관리자 디지털제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과 질정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2.04.12
박병훈 마을에서 민감한 내용의 인터뷰를 하시느라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송계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작성자님 감사합니다. 201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