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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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民黨- 民推協- 改憲懸板式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86년 4월 5일 -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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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아세아극장 -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
성격 | 정치운동 |
[정의]
1986년 신민당과 민추협이 추진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 서명운동을 위한 현판식.
[개설]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은 1986년 4월 5일 신민당과 민추협이 대구의 아세아극장에서 개헌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거행한 정치 행사이다.
[역사적 배경]
신민당[신한민주당]과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의 개헌 현판식은 1985년 12월 신민당이 정기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개헌 특위]를 설치하는데 실패하자 원외투쟁을 전개하기로 하면서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더불어 거행한 행사이다.
[경과]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은 신민당이 1985년 12월 정기국회에서 국회 내 개헌 특위의 설치가 좌절되자 김대중이 공동 의장을 맡고 있던 민추협을 중심으로 ‘민주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개헌 운동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신민당과 민추협은 1986년 3월부터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개헌추진 시도지부 결성대회 및 현판식’을 강행하였다. 1986년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 대회를 시작으로 하여 3월 23일 부산 대회, 3월 30일 광주 대회가 열렸다.
대구에서의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 현판식은 1986년 4월 5일 개헌추진위원회 대구경북지부 결성대회[지부장 김수한]와 함께 신민당 이민우 총재와 부총재단, 김영삼 고문, 신민당 소속 의원 60여 명, 김명윤·김창근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 등 재야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아세아극장[아세아극장은 멸실되어 지금은 주차장이 들어서 있음]에서 거행되었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치사를 통하여 “6·25동란 때 국가 보위의 마지막 저지선이었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민주운동의 진원지 대구에서 이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80년대의 역사 흐름에 중요한 한 고비를 이룰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고문은 격려사를 통하여 “나는 민주 쟁취의 과정에서도 어떤 폭력이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이 나라의 민주화는 이제 지체 없이 이루어져야 할 만큼 역사의 순리로 무르익었다”고 주장한 뒤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김대중 두 김씨 간에 삼자 시국 회담을 제의하였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 의장은 녹음 연설을 통하여 “야권의 결속 속에 온 국민이 개헌 서명운동에 앞장설 때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결과]
대구의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은 민족통일연맹 경북지부가 ‘4·5대구민중투쟁’이라고 평가할 만큼 정당인 외에도 대학생과 재야 세력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구에서의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에 대하여 당국은 식장인 아세아극장 옥상 출입구를 시멘트로 봉쇄하고, 예비군 비상소집 훈련을 실시하며 방해하였고 경찰은 141명을 연행하고 16명을 구속하는 등 강압적으로 대응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은 1985년 신민당이 100석 이상의 국회의원을 확보한 2·12총선[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열기를 한 단계 끌어올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중의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