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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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節紀念式左右翼對立 |
영어음역 | Samiljeol Ginyeomsik Jwauik Daerip |
영어의미역 | Conflict between Right and Left over the March the First Commemor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인용 |
성격 | 좌·우익대립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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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46년 3월 1일 |
종결연도/일시 | 1946년 3월 1일 |
발생(시작)장소 | 옥천초등학교 |
발생(시작)장소 |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
관련인물/단체 | 농민조합|민족해방청년회|부녀동맹|노동조합원|학도대|건국청년회|우국동지회 |
[정의]
1946년의 3·1절 기념식 행사 시 벌어진 좌·우익세력들 간의 대립·충돌 사건.
[개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3·1절 기념식을 좌익은 강릉초등학교, 우익은 옥천초등학교에서 각각 개최하였는데, 좌익이 우익의 3·1절 기념식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우익 기념식장에 몰려와 서로 갈등을 빚었다.
3·1절 기념식은 1919년 3월 l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
해방 이후 3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정치세력은 대체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노동자와 농민계급을 정치세력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사회구조의 전반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구했던 좌익세력과 지주와 자본가계급이 정치세력의 중심이 된 정치 사회의 건설을 통하여 기존의 지위와 권리를 더욱 강화하고자 했던 우익세력이다.
우리나라에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시점은 일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해방 이전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로부터 사회주의이론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사회주의이론을 수용한 지식인들을 좌익,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지식인들을 우익이라 불렀다.
좌익과 우익사이에 틈이 벌어진 계기는 신탁운동에 대한 입장이었다. 우익은 신탁운동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좌익은 찬탁운동을 벌이면서 갈등은 심해져갔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일제시대 우리민족이 선택해야 했던 사상이었으며 양자 모두 조국 광복이 목적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목적]
3·1운동 기념일 행사를 분리·개최하는 과정에서 좌익세력이 우익세력의 기념일 행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발단]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처음 맞이한 3·1운동 기념일 행사를 분리해 개최할 정도로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상황이 물리적 충돌로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과]
1946년 3월 1일에 좌익은 강릉초등학교에서 농민조합, 민족해방청년회, 부녀동맹, 노동조합원 등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이 모여 3·1운동 기념일 행사를 개최하였고, 우익은 옥천초등학교에서 학도대, 건국청년회, 우국동지회 등을 중심으로 200~300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우익 기념식장에서의 연설시 좌익이 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옥천초등학교로 몰려와 좌익과 우익이 대립·충돌하게 되었다.
[결과]
좌익세력들은 우익의 기념식을 방해하려고 우익의 기념식장에 몰려들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미군정청에 연락하여 미군이 곧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좌익세력들은 당초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좌익과 우익,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광복된 조국의 번영이었으나, 조국 광복의 방법과 광복된 조국의 경영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광복이후 좌·우익의 대립은 이러한 사고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