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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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運動 |
영어음역 | sahoe undong |
영어의미역 | social movemen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김남현 |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사회의 변혁·개량이나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벌이는 운동.
[개설]
영동은 태백산맥의 동쪽지역으로 식민지 시기 행정 구역상으로는 강릉, 고성, 삼척, 양양, 울진, 통천의 여섯 개 군을 가리킨다. 대지주 경영의 미발달과 농업경영의 영세성 그리고 낮은 농업 생산력과 인력의 어업 진출에 따른 조선인 어업의 몰락으로 특징지어진 영동 지역은 노농 조직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지역이었다. 이는 1920년대 전반기 중앙의 노농, 청년 운동 단체에서 전국적인 대회를 개최했을 때 참가한 강원도 지역 단체가 대부분 영동 지역에서 조직된 것임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3·1 운동을 전후한 시기 영동 지역 각 군에서도 청년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동 각 군의 운동자들은 영동 기자 대회와 영동 기자단을 중심으로 운동의 활성화와 연락·통일을 꾀하였다. 영동 기자단은 1925년 12월에 개최된 영동 기자 대회서 상설기관으로 발기된 것으로 ‘영동 6군 조선문 각 신문, 잡지 기자로 조직’되었다. 그것은 각 군의 사회운동자들이 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지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상황에서 신문 기자 모임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각 군 사회운동자들이 모여 각 지방의 운동상황을 파악하고 운동 방침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는 그들이 일 년에 두 차례씩 개최하는 총회와 한 차례씩 개최하는 기자 대회에서 언론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각 군의 상황을 보고하고, 대중 운동에 대한 적극적 원조와 각 군 사회단체에 대한 조사 등을 결의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영동 기자단 정기 총회나 영동 기자 대회가 개최되는 곳에서는 침체되었던 종래의 운동을 부흥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즉 영동 기자 대회와 영동 기자단 총회가 가장 많이 개최된 강릉에서는 제1회 영동 기자 대회와 영동 기자단 발기 총회 바로 전인 1925년 11월에 ‘농촌 계몽, 청년 운동 통일’을 목표로 ‘을축 신우회’가 조직되었다. 을축 신우회를 발기한 최돈근, 정윤시, 김재진은 주로 강릉 청년회와 영동 기자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로, 그들은 침체되었던 강릉 청년회의 부흥을 꾀하는 한편 군단위 청년 동맹 조직에 주력하였다.
또한 제4회 영동 기자단 정기총회 개최를 9일 앞둔 4월 1일, 강릉에서는 이명의, 김길인 등에 의해 칠팔 구락부가 조직되었다. 한편 1926년 4월 제2회 영동 기자 대회가 개최된 울진에서는 그것의 개최를 앞두고 울진 청년회, 혁신총회가 개최되어 군연맹이 발기되었고, 제3회 영동 기자단 정기총회가 개최된 삼척에서는 삼척청년회가 총회 개최를 계기로 영동 각군의 기자를 초청하여 시사대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을 재개하였다.
강원 청년 연맹이 원활한 활동을 못하고 침체되어 있을 때 영동 각군에서는 영동 기자단과 영동 기자 대회를 중심으로 영동 각군의 운동이 활기를 띠어 나갔다. 그런 속에서 1927년 3월 조선 공산당 및 고려 공산 청년회 강원도 도기관이 조직되었다. 그것은 영동 지역의 주요 활동가인 김대봉과 박태선이 중앙과 원산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상황에서 변성청년회, 관동 청년 대회, 강원 청년 연맹 등에서 활동했던 함연호, 한명찬, 정의식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조직 구성을 보면 조선 공산당 강원도 도기관 책임비서에는 한연호가 위원에는 한명찬, 정의식이 임명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 강원도 도기관 책임비서에 한명찬이 임명되었다. 또한 도기관이 조직되자 철원과 양양에 야체이카가 조직되었는데, 영동 지역에 조직된 양양 야체이카는 책인 함연호, 회원 김병환, 함하준, 김필선, 후보 김동환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조선 공산당 및 고려 공산 청년회 강원도 도기관이 조직되자 도기관은 전강원도사회운동 단체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침체되었던 강원 청년 연맹의 혁신을 꾀하였다.
제4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인한 검거는 영동 지역 사회운동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특히 고성, 양양 지역 활동가들이 조선 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강원도 도기관에서 적극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사회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래 영동 기자단이나 영동 기자 대회 등을 중심으로 운동이 부흥하기 시작했던 강릉, 삼척, 울진군에서는 운동자의 대부분이 조선 공산당 및 고려 공산 청년회 강원도 도기관에 참여하지 않은 관계로, 운동 역량이 보존될 수 있다. 따라서 제4차 조선 공산당 사건 이후 고성, 양양군의 운동이 침체된 반면 강릉, 삼척, 울진군에서는 지역 전위 조직을 중심으로 적색 농민 조합, 적색 노동조합, 반제 동맹을 조직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 각 군에 조직된 지역 전위 조직은 해당지역의 사회운동을 총괄, 지도하는 기관으로서 조직의 궁극적 목적은 당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영동 지역에서 지역전위조직이 가장 먼저 조직된 곳은 강릉군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강릉군은 1920년대 중반부터 강릉 청년회를 중심으로 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그것이 해체되고 조직된 강릉 청년 동맹은 1927년 12월 신간회 강릉 지회 조직 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29년 5월 조직된 강릉 농업 학교 독서회를 지도하였다. 그런 속에 일본 전협에서 활동하던 강익선이 귀향하였다. 그는 귀향 후 신간회 강릉 지회, 강릉 청년 동맹 등 합법 단체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는데, 1930년 말 양 조직의 해소 운동이 제기되자 양 단체의 해소를 적극 도모하였다. 한편 그는 전위 분자의 규합에 주력하여 1931년 1월에는 최선규, 조국환, 정용화, 이상각 등과 함께 연구회를 조직하고, 각군, 각 동에서 야학, 연극, 간담회, 좌담회 등을 개최하여 농민의 의식 고취를 꾀하였다. 또한 그들은 농촌 진흥회를 적극 활용하여 일제의 자력 갱생 정책을 폭로·비판하는 한편 각종 기념일의 기념식을 통해 선전·선동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강익선, 권인갑, 조규필, 최돈근, 홍광중 등이 1931년 3월 19일 ‘강릉 적농 결성 준비 위원회’와 11월 10일 강익선은 최선규, 정인화, 조국환, 최돈근, 조규필 등과 함께 자신을 책임자로 하는 ‘강릉 공산 청년 동맹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였다. 이 두 조직이 완료되자 권인갑, 강익선, 홍광중, 정용화 등은 2개의 조직을 지도·통제할 조직으로 ‘조선 공산당 강릉 공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강릉, 고성, 양양 등 3개 군에 걸쳐 적농, 적노, 반제 동맹을 조직하려는 강릉공작위의 활동은 1933년 가을부터 시작된 대규모 검거로 일시에 와해되어 버렸다 .
강릉 공작위의 활동과 권인갑, 강익선 등 운동의 지도부가 검거된 상황에서 나타난 최종성, 최돈영, 김재호 등의 재건 노력은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1920년대 중반 이래 꾸준히 성장해온 운동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3·1 운동 이래 영동지역 사회운동은 첫째, 지주 경영이 발달하지 못하고, 자급자족적인 영세 소경영이 발달한 영동 지역에서는 농민을 대지주 투쟁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3·1 운동 이래 영동 지역 사회운동은 노동자, 농민과 결합되지 못하고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20년대는 물론이고, 1930년대 역시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성장한 인물들이 지역 전위 조직의 조직과 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영동 지역 사회운동은 1920년대에는 고성, 양양을 중심으로 1930년대에는 강릉, 삼척, 울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고성군은 1920년대 초기부터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선진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셋째, 1930년대 강릉, 삼척, 울진군에서의 지역 전위 조직의 활동은 청년 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 신간회, 청년 동맹 등 합법 단체를 해소한 뒤 사회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타 지역에서 들어온 활동가와 제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넷째, 1930년대 조직된 지역 전위 조직은 노조, 농조, 반제 동맹의 조직에 주력하였고, 그러한 조직 활동의 출발을 독서회나 야학의 조직에 두었다. 즉 1920년대 농민, 노동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거의 전무한 영동 지역에서 1930년대 운동 주체들은 야학을 대중엔 대한 선전 선동의 장일뿐만 아니라 독서회원을 확보하는 장으로 그리고 독서회를 농조, 농조의 조직원을 확보하는 장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조직하려고 했던 노조, 농조는 노동자, 농민 일반의 조직이라기보다는 독서회 등을 통해 확보된 선진 분자들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1920년대 노동 운동이 거의 전무하던 영동 지역에서도 1930년대에는 지역 전위 조직에 의해 노조 조직 활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영동 지역에 노동 운동이 전무하였던 것은 주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산업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산업 구조상 노조의 객관적 기초가 미약했던 영동 지역에서 노조 조직 운동이 이루어졌던 것은 1928년 이래 정어리 가공 공장이 증설되고, 그에 따라 해운 교통의 중심지에 운수 노동자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전위 조직의 노조 조직 활동은 영동 지역 해운 교통의 중심지인 주문진, 정라진의 정어리 가공 공장 노동자와 운수 노동자에 집중되었다.
1930년 강릉, 삼척, 울진군에 조직된 지역 전위 조직의 활동기간은 불과 1~2년으로 대개 적농과 적노를 조직,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이 와해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과 더불어 이들 3개 군에는 인민 위원회가 급속한 속도로 조직되었고, 그것은 행정, 사법의 통치권을 행사함으로써 강원도 각 군에 조직된 인민 위원회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또한 거기에는 1930년대 지역 전위 조직에 참가했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1930년대 지역 전위 조직에서 활동한 인물로서 강릉의 조규필, 이상옥, 삼척의 정건호, 울진의 진기열, 양양의 강환식 등은 전국 인민 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대표로 참가하고 있다.
이는 1930년대 지역 전위 조직을 중심으로 한 운동 기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들 3개 군에서 전개된 지역 전위 조직 운동의 역사적 의의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