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931 |
---|---|
한자 | 三一萬歲運動 |
영어음역 | Samil Manse Undong |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동희 |
[정의]
1919년 3·1운동 당시 강릉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비롯된 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강릉에서는 초당리 청년 최돈옥(崔燉玉)이 탑골공원의 독립선언 식장에 참여하고 돌아온 즉시 창동회(昌動會)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대체로 강릉 지방의 3.1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후인 4월 2일과 4일·5일·7일·8일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최소한 6회 이상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강릉의 3·1만세운동은 신교육을 받은 청년들과 감리교인들이 주동이 되어 전개되었다. 강릉은 보수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교육도 일찍 실시되어 일부 계층에서는 세상의 변화에 민감했으며, 3·1만세운동 당시에는 기독교(감리교파)가 전파되어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강릉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원래 강릉은 유학의 고장으로 동학란 때에는 반 동학군을 형성하는 등 보수성이 철저하였으며 3·1만세운동 발발 시에는 젊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유도진흥동지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구한말부터 많은 사립학교가 설치되어 신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감리교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초당리(草堂里)는 여운형(呂運亨)이 영어학교(英語學校)에서 신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던 관계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영어학교가 폐교되어 여운형이 강릉을 떠난 후에도 그의 사상적 영향은 초당야학을 중심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3·1운동은 감리교인·강릉청년회원·초당리의 농민과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나게 되었다.
[목적]
한민족의 자존을 위한 각성과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일어났다.
[발단]
강릉의 3·1만세운동의 기운은 1919년 3월 초부터 태동하였다. 즉 3월 8일에 성남면(城南面) 내곡리(內谷里)의 청년 최돈영(崔燉瑛)이 최승규(崔昇圭)·최용식(崔溶植) 등과 시국을 논의하다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3개월(태 90대)의 언도를 받았다.
강릉에서 3·1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초당리의 청년 최돈옥이 고종의 인산에 참례했다가 돌아오면서부터이다. 최돈옥은 당시 23세의 청년으로 유도진흥동지회원으로 고종 인산 때 상경하여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식에도 참여했고, 선언식 현장에서 “지방의 독립운동을 확산”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부락협동조직체인 ‘창동회’의 지도자 및 야학회의 교사인 최이집(崔頤集)[32세]·최진규(崔晋圭)[31세]·최선재(崔善在)·조대현(曺大鉉)·최선근(崔善根)·김진숙(金振淑)·정식화(鄭軾和)·최선호(崔善浩) 등과 합심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경과]
강릉의 3·1만세운동은 소수의 감리교인과 선각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일반인 특히 농민들을 참여시켜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 하에 전개되었다.
1) 4월 2일 만세운동
4월 2일에 전개된 만세운동은 강릉보통학교(江陵普通學校) 학생들과 당시 감리교회의 목사였던 안경록(安景祿)을 비롯한 강릉감리교회 교인들, 그리고 강릉청년회가 함께 계획한 시위운동이었다. 강릉보통학교의 김춘경(金春卿) 교사와 주모자 대표격인 이명의(李明儀)[20세]는 강릉청년회와 밀의하여 이 학교의 제4학년 졸업반인 신수봉(申守奉)[22세], 권춘만(權春萬)[15세], 최봉규(崔奉圭)[18세], 김영두(金榮斗)[17세], 이택수(李澤壽)[16세], 이준모(李俊模)[16세] 등과 4월 2일 강릉 장날에 장꾼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예상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면서 교내 학생들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같은 반 심모(沈某)의 밀고로 모두 체포되어 강릉에서의 최초의 거사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나, 일부 학생들은 장터에 나가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들 주모자급 학생들은 강릉경찰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아가며 3일간 조사를 받았으며, 주동자 이명의는 태(笞) 90대를 선고받고 하루 30대씩 3일간 집행 당하였다. 당시 강릉보통학교는 경찰서와 가까이 있는 임영관을 빌려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경찰서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자기 모자를 찢으면서 “나 이제 간다.”라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그는 신수봉과 함께 퇴학을 당하였고, 다른 학생들은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원래 강릉보통학교 학생들과 강릉감리교회 교인들이 합세하기로 하였으나, 강릉보통학교 학생들은 사전에 탄로되었기 때문에 감리교회 교인들과 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장터에 나가 만세를 불렀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강릉감리교회 목사였던 안경록과 그를 중심으로 조직된 ‘강릉청년회’ 회원들이었다.
그리고 유도진흥동지회 회원들인 최선재(崔善在)·조대현(曺大鉉)·최돈옥(崔燉玉)·김진숙(金振淑)·최선호(崔善浩)·최진규(崔晉圭)·최선근(崔善根) 등은 감리교회 그리고 강릉청년회와 긴밀하게 협조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많이 준비하면서 지역 유지에게 연락을 취하여 장날인 4월 2일 오후 4시에 어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그 여세를 몰아 100m 정도 떨어진 경찰서를 향해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만세 군중의 선두에는 감리교회 신도와 강릉청년회 회원들이 앞장섰으며 일경은 총검으로 제지하였다. 이에 “적아! 오늘부터 조선에서 물러가라! 우리는 자유민임을 세계만방에 표명하노라!”하며 소리높이 외치며 대항하였다. 일경들은 국상 중에 입는 백립(白笠)을 파탈(擺脫)하고 갖은 욕설을 하면서 체포하려고 하자 이들은 더욱 분발하여 “이놈들 국상 중에 백립까지 증오시하고 파열하니 이렇게 무례한 만행(蠻行)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하며 저항하였다. 이때 일경은 총검으로 위협하며 10여 명을 체포하였고 많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에 대한 일본헌병대의 보고 자료에는 55명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축소된 것으로 실제로는 100여 명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이날의 만세운동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강릉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는 첫째로 보수성이 강한 이 지역에서 감리교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감리교인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로 강릉보통학교 주동 학생들의 체포와 청년회원들에 대한 감시와 예비검속으로 인해 일반인들에 대한 홍보가 미흡했으며, 셋째로 만세운동의 당위성이나 효용성을 깨닫지 못한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의 결여 때문이다. 이날 만세운동에 대한 당시 강원도장관의 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작일(昨日) 강릉시장에서 7~8명이 구한국기를 지(持)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20여 명이 화창하였으며 타군중은 참가하지 않고 해산 주모자 취조 중”
위 보고서에서 나타난 주모자는 안경록이었고 20여 명만이 호응하였다고 한다. 김정명(金正明)의 『명치백년사(明治百年史)』와 『조선독립운동』Ⅱ에는 50여 명이라 했으나 이 날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날임을 고려해 볼 때 참여한 인원은 100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주모자로 체포된 최선재, 조대현은 징역 10월, 최선근은 징역 6월, 최돈옥과 김진숙은 징역 4월을 선고 받았다.
2) 4월 4일 만세운동 : 남대천 농민시위 운동
4월 4일의 만세운동은 초당 창동회의 최이집(崔頤集)·최진규(崔晉圭)가 주도하였고, 최돈제(崔燉濟)·박장실(朴章實)·최영방(崔永邦)·김봉공(金鳳公)·유옥일(柳玉一)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야학 학생들을 동원하고 청년회원이며 초당의숙 졸업생인 최돈제를 통해 감리교회 신도들과 함께 교회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거사일을 송정·초당·포남·운곡·옥천의 5개 부락 주민들이 모여 그들이 경작하는 논으로 들어오는 물길을 수리하는 남대천 하평보(下坪洑) 공사일로 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날의 만세운동에는 송정·초당·포남·운곡·옥천 등 5개 부락이 참여하는 매우 조직적인 운동이었다.
초당야학 학생들은 비록 정규 학교의 학생들은 아니었지만 영어학교 이후에 초당에서 내려오는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항일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이들 야학 학생들은 선창부(先唱部)와 해산방지부(解散防止部)를 구성하여 보 공사를 마친 농민들이 장터거리로 집결하여 괭이와 삽 그리고 가래를 들고 시위를 벌일 때 조직적으로 질서를 유지해 가며 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4백여 명이 넘는 농민들의 질서 있는 만세운동에 대하여 당시 강릉에 주둔하고 있던 중대 병력의 일본군과 경찰은 만세운동을 막기 위해서 발포는 하지 않았다. 해산하는 군중과 충돌은 있었지만 당일은 무사했다. 이 때 초당의 권국보는 일경과 가래자루를 맞잡으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일경을 넘어뜨려 군중의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튿날부터 검거선풍이 일어나 “소요인원 60명, 검거인원 7명”이 검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400여 명이 넘는 농민이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최이집과 최진규는 강릉지청에서 재판을 받아 원산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으며 박장실(朴章實), 최영방(崔永邦), 김봉공(金鳳公)은 태(笞) 90대를 선고 받았고, 유옥일(柳玉一)은 기소유예가 되었다. 그리고 초당리의 권복수(權復洙)는 현장에서 참혹한 태형을 당하였다.
이날의 시위의 특징은 몽양 여운형의 지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던 초당야학 출신들의 주도로 많은 농민들이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시위는 상당히 조직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계층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3) 4월 5일 만세운동 : 만세운동의 확산과 횃불 시위
4월 2일 장날 만세운동과 4월 4일 남대천 농민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3·1만세운동의 기운은 강릉 지방 여러 곳으로 번져 나갔다. 구정(邱井)·주문진(注文津)·성산(城山)·사천(沙川)·왕산(旺山)·연곡(連谷)·강동(江東)·옥계(玉溪)·현남(縣南) 등 면소재지 부락에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횃불 시위를 하다가 해산 당하였다. 특히 망상(望祥)에서는 오후 8시경부터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수천 군중이 참여하였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4월 5일 하루 동안 각 면에서 시간은 다르지만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동안 현대 개화교육과 구국 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사립학교에서 배출한 청년들과 강릉청년회·강릉초당청년회 회원들의 활동이 컸으며 횡적인 연락과 유대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의 시위는 각 동네 지도자들 간의 사전 협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한 상세한 근거나 진행과정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전반적인 양상은 3·1만세운동은 도심지뿐만 아니라 산간벽지 사람들까지 널리 호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4월 7일 만세운동 : 교회 청년회 중심의 만세운동
4월 2일·4월 4일의 만세운동으로 10여 명이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가 적용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고 불기소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몇 차례의 만세운동을 통하여 자신감을 얻은 만세운동 추진 세력들은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날인 7일, 강릉의 모든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강릉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강릉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들과 감리교회 청년들로 구성되었던 강릉청년회를 주체로 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4월 2일과 4월 4일 만세운동에 놀란 일경은 강릉감리교회 앞에 초소까지 설치해 놓고 삼엄하게 감시를 하였다.
강릉청년회에서는 만세운동 추진본부를 지금의 시청 앞 교차로 부근에 있던 이윤식(李允植)의 상점으로 옮겨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한 시내 연락처는 조대현과 최선호의 상점으로 정하고 창호지와 곶감꽂이로 4월 6일에 태극기 5백여 매를 만들어 놓고 일부 청년들은 군중을 동원하기 위하여 흩어지고 나머지는 이윤식의 집과 감리교회에서 잠을 잤는데, 이날 밤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탄로의 경위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교회와 그 외의 집에서 자던 사람들이 많이 잡혀갔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청년들은 이튿날 교회로 갔으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태극기를 맡겨 두었던 이윤식의 상점으로 가보니 이미 태극기도 빼앗기고 사람도 잡혀 갔다.
이 때 잡혀가지 않은 청년들은 다시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급히 장터 옆에서 셋방을 얻어 상점을 하던 최선근(崔善根)의 집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접시로 태극 문양을 그리고 곶감꽂이를 깃대로 사용하여 급하게 만들어진 100여 매의 태극기를 장터 군중들에게 나눠주며 젊은 청년들은 만세를 불렀다.
이미 2일·4일 만세운동을 통해 참 의미를 깨달은 강릉 군중 수백 명과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팔 물건마저 버린 채 경찰서로 향했다. 군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만세소리가 충천하였고, 장터의 난전상인들도 장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합세하였다. 점포 문을 열었던 상점들도 일제히 문을 닫고 만세운동에 합세하였으며, 문을 닫지 않고 방관하던 상점들은 군중의 팔매질을 당하고서야 문을 닫기도 하였다. 이렇게 규모가 늘어난 만세 시위대는 장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경찰서를 향하여 “구속된 인사를 석방하라.”, “일본은 당장 조선에서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때 일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던 100여 명의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4월 5일 이후 증강된 중대 규모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 가는 길에 제지되고 말았다. 5일 이후 대폭 증강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공포를 쏘며 맞섰다. 이 때 강릉군수 이택규(李宅珪)와 김모 경부(警部)는 군중과 수비대 사이에서 “총은 쏘지 마라, 선량한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며 만류하였다고 한다.
당시 군중은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전시가지는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어 군중들은 군수의 설명과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구심점을 잃는 바람에 흩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날 일제는 군경을 동원하여 장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장보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 사전 방지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12시에 장터에 나온 사람들과 노점상들까지 가세하여 경찰서로 행진하자 일제는 총검으로 제지하였다. 흩어지는 군중들은 남산과 월대산 또는 화부산에 모여 오후 3시부터 만세를 불렀다.
일경은 이날의 만세운동 참여인원을 최종적으로 “참가인원 150명, 검거인원 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참여 인원은 1,0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100여 명 가까이 되어 조사는 3일간 계속되었다. 이들은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일경이 만세시위를 한 경위를 물으면 독립을 위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대답하였다. 일경은 모진 매질과 고문으로 주모자를 조사·추궁하였고, 일부는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5) 4월 8일 만세운동
4월 2일·4월 4일의 만세운동으로 10여 명이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가 적용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고 불기소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4월 8일에도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소상하게 알만한 증언자나 자료를 찾지 못해 그 성격과 규모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일제의 '본 조선군 사령부의 보고'에 일군 수비대가 경찰과 협력하여 해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으로 볼 때 소규모 운동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5월에도 만세운동이 있었고, 적은 기록이지만 상당히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이는 일제가 국제여론의 악화를 우려해 가능한 한 은폐·축소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결과]
강릉 지방에서 3·1만세운동 주동자들은 4월부터 검거되기 시작하여 6월 18일까지 145명이 검거되었다. 이는 3·1만세운동이 발생하였던 4월부터 검거가 시작된 이래 만세운동이 종료된 후에도 계속하여 주동인물을 색출하였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일제가 우리 민족운동의 뿌리까지 말살하려는 무단통치정책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강릉 지방의 많은 의식 있는 지도자들을 무차별 검거하였음을 보여 준다.
일제는 3·1만세운동 주동자들을 검거하여 사소한 혐의라도 발견되면 인신구속을 하여 태형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잔학한 수법을 강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소된 3·1만세운동 주동자들은 보안법위반이나 소요죄에 적용되어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태형에 처해졌다.
[의의와 평가]
강릉 지방의 3·1만세운동은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으로 활발하게 발생하였던 인근 양양 지방에 비해 저조하였지만 오로지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이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추진되어 향후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강릉 지방의 3·1만세운동은 한정된 계층의 참여, 비조직적 활동, 정보전달의 지연 등으로 비록 처음에 의도하였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일반 민중들을 각성시켜 독립에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발생한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특히 강릉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인물들은 이후 전개되는 민족계몽운동,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나가는 핵심 주체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