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055 |
---|---|
한자 | 聖潔敎 |
영어음역 | Seonggyeolgyo |
영어의미역 | Holiness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남현 |
[정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 복음과 오순절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개신교 교파.
[개설]
감리교회와 함께 영동 지역에서 선교를 담당한 교파는 성결교회였다. 『한국성결교회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성결교회는 1904년 정빈, 김상준 씨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서학원을 수료한 후 한국에 돌아와 동양선교회의 지원으로 복음전도관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1921년에는 이를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교파로 개칭하는데, 영동 지역에는 미 남감리교회와 더불어 이 성결교회가 들어오게 된다. 강릉에 성결교파의 기도소에서 첫 집회가 시작되는 것은 1923년 3월로 이는 경성신학교 지방전도대에 의하여 강릉읍 용강동 28번지 박신동 씨 집에서이다. 이것이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강릉성결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923년 3월 강릉에 성결교파의 기도소에서 첫 집회가 시작된 후 현재 있는 17개의 성결교회가 세워졌다.
[변천]
1925년 9월 첫 주일에 거진학 전도사가 부임하여 박신동, 서순명, 최원주, 김인, 김상열, 이부대 등 장년 5명 유년 13명의 신자와 함께 창립 예배를 드렸다. 1928년 4월 28일 강릉성결교회는 북청지방 관할이 되었다.
1930년 8월 약국 성황당 터 자리인 임당동 171번지에 대지 578평 건평 20평의 양철지붕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1930년 당시 강릉에는 강릉예수교 남감리회당과 강릉성결교회 두 교회당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에 의한 교회 탄압은 강릉성결교회에도 뻗치어, 1943년 5월 24일 교직자 검속령에 의해 이옥근 전도 부인 등 10여 명의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1943년 12월 28일에 강릉성결교회는 폐쇄를 당하여 해방될 때까지 신자들은 강릉금정교회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연곡에 성결교회가 선 것은 1966년 3월 당시 박태희 전도사가 주문진성결교회에 속해 있던 연곡 구역의 신자 20여 명을 별도로 분리하면서이다. 그 당시 연곡지서 주임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다.
[현황]
강릉시 강동면 정동에 영동 성결교회가 시작된 것은 1956년 6월 영동광업소가 개광되면서, 광원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였던 사장 최호 씨와 김영길, 장의찬, 원필순, 정선자 씨 등을 중심으로 임시 기도처를 정하여 예배를 드리면서부터이다. 1958년 3월 어린이 37명(남20, 여17), 어른 21명(남8, 여13)이 최호 씨 집을 예배처소로 삼아 영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959년 11월 영동광업소의 기부로 대지 259평 건평 28평의 교회가 신축되었다.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교단에 가입된 것은 1962년 5월의 일이다. 광산의 번창과 함께 교세도 일어나 1980년 중반에는 세례 교인수가 약 15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1990년도부터 시작된 광산합리화 정책으로 폐광되자 주민의 4분의 3이 떠나면서 현재는 상황이 어렵지만 정동진 관광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1945년 11월 9일 성결교회 재흥 총회에서 5개 교구 가운데 중부 교구에 속하게 된 강릉성결교회는 교회 명칭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강릉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의 성결교회는 강릉교회를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
월호평동에 신석성결교회가 선 것은 1963년 최춘근, 김옥열 등과 남신도 1명, 여신도 10명, 어린이 140명으로 시작되면서이다. 1965년에는 탁아소를 설치하여 저소득 아동의 보육사업을 실시하였으며 태풍 루사로 인하여 교회당이 손실되었으나 다시 예배당을 신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