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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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南觀察府 |
영어음역 | Chungnam Gwanchalbu |
영어의미역 | Chungnam Government Offi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조선 전기부터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관찰사가 파견되어 직무를 보던 관아.
[개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공주 지역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감영의 소재지이자 관찰사가 위치하는 행정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등급에 따라 중앙으로부터 부윤(종2품), 군수(종4품), 현령(종5품), 현감(종6품) 등의 수령이 파견되었다. 공주 지역에는 충주·청주·홍주와 함께 정3품의 목사가 파견되었다. 목사는 충청도에서 가장 높은 수령이었다.
조선 전기의 충청도 지역에는 55개의 고을이 있었으며, 충주·청주·공주·홍주의 4목과 51개의 군·현이 나누어 소속되었다. 공주목의 관할은 임천·한산·서천의 3개 군(郡)과 회덕·진잠·연산·은진·이산·석성·부여·홍산·비인·남포·정산 등의 11개 현(縣)이었다.
세조 때에 확립된 조선 전기의 진관체제하에서 지방 수령은 각각 군직을 겸임하였으므로, 군정 관계상 수령 상호 간의 위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즉, 당시 군사 조직은 각도 병마사(병사)와 수군절도사(수사)의 소재지를 주진이라 하고, 그 밑에는 각각 여러 개의 거진을 두어 첨절제사가 이 거진을 단위로 하는 진관 아래 여러 개의 제진을 두어 동첨절제사·절제도위·만호가 이를 관장하였다. 충청도는 충주·청주·공주·홍주가 각각 거진으로 설정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소군현을 관할하였다.
공주진관에는 임천·한산·전의·정산·은진·회덕·진잠·연산·이산·부여·석성·연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공주목사는 병마첨절제사(서반 종3품직)를 겸하였으며, 임천·한산군수는 병마첨절제사(서반 종4품직), 그 외의 나머지 10개 고을의 현감은 병마절제도위(서반 종6품직)를 겸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조선 전기 공주목의 사방 경계는 공주 관아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으로 회덕에 이르기까지 15리, 서쪽으로 대흥에 이르기까지 41리, 남쪽으로 이산에 이르기까지 34리, 북쪽으로 천안에 이르기까지 48리였다. 또한, 국가에서 파악하고 있던 공주목의 호구 수는 호가 2,167호, 인구가 10,049명이었다.
이와 같은 공주 지역의 형세는 당시 55개 고을로 이루어져 있던 충청도 전체(4목, 11군, 40현)의 24,170호와 인구 100,790명의 약 10%에 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충청도 내의 다른 목사파견 고을인 홍주목의 1,379호와 6,031명, 충추목의 1,871호와 7,452명, 청주목의 1,589호와 6, 738명과 비교해 보아도 공주목이 단연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정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 수백 년간 추구되어온 중앙집권화 정책의 결과 조선 전기 『경국대전』 단계에 이르면 형식적으로는 일단 중앙집권제가 완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집권제의 다양한 변수들 가운데 군현제와 외관제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전부터 시행하여온 온 군현제와는 달리 외관제는 조선 전기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하는 관찰사를 중심으로 정비되고 확립됨으로써 『경국대전』에서는 경관직에 상응하는 외관직으로 설정되었고, 이러한 틀은 조선 말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관찰사는 조선시대 각 도에 1명씩 임명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자기 관할의 도에 대해 행정·군사·사법을 포괄한 도정 전반을 지휘하고 감독하였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기에 일도지왕(一道之王)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업무는 외관의 규찰·권농·안집·관학·전수·형옥·병마 등이었으며,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려 진휼하는 것도 관찰사의 주 업무였다. 조선시대 국가 시책의 하나인 권농 정책에 맞추어 농사를 짓도록 독려하고 양잠을 장려하는 일 등도 관찰사가 수행할 임무 중의 하나였다. 이외에도 도내의 교육을 담당하고 최고 재판관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군사상의 직임을 담당하면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기도 하였다.
[관련기록]
충남관찰부에 관한 관련 기록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공주목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시대 공주 지역의 행정체계와 인구, 호구 등에 관하여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 등이 있다.
[내용]
충청도는 고려 후기의 양광도가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양광도는 오늘날의 경기도 남부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1395년(태조 4)에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면서 양광도에 속했던 양주·광주가 경기도로 옮겨졌고, 공주·홍주·충주·청주 지역을 합하여 비로소 충청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충청도란 이름은 계수관 고을인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어진 것으로 역모나 강상사건에 의해서 일시적으로는 충공도·청공도·공청도·공홍도·충홍도·홍충도 등으로 고쳐 불리기도 했으나, 충청도라는 명칭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
대체로 현재의 충청남북도 지역에 해당하던 충청도 지역의 감영이 조선 전기에는 주로 충주 지역에 있었으나, 1602년(선조 35)에 공주 지역으로 옮겨져서 조선 말기까지 지속하였다. 사실 이전에도 일시적으로 공주 지역에 감영이 설치된 적이 있긴 하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1602년(선조 35) 이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감영으로 본영(本營)과 유영(留營)이 있었는데, 1603년(선조 36)부터 충청도관찰사가 공주목사를 겸하게 됨으로써 공주 지역은 명실상부한 호서의 중심 고을이 되었다. 조선 후기 공주목의 관청 시설은 감영이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자리에, 목(牧)시설이 공주중동초등학교와 공주의료원 자리에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행정편제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맞게 되었다. 갑오개혁은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대개혁으로 개혁의 범위는 정치·경제·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 중에 지방행정에 관한 개혁으로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 등의 이전 지방관이 군수로 통일되었다. 공주 지역도 이전의 공주목이 공주군으로 바뀌어 목사 대신 군수가 부임하기 시작하였으며, 충청도 지역은 대체로 충주부·홍주부·공주부의 3부로 나뉘게 되었다.
공주에 부청 소재지를 둔 공주부는 27개 군을 거느렸으며, 부의 장관으로는 관찰사 즉 공주부관찰사가 파견되었다. 공주부의 27개 군은 당시 홍주부가 오늘날 충청남도 서부지역 22개 군을, 충주부가 오늘의 충청북도 지역 20개 군을 관장하는 것에 비해 관할 규모가 큰 것으로 전국의 23부 중에서도 27개 군을 관장하던 평양부와 더불어 가장 많은 군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896년(고종 33)에는 23부가 폐지되고 13도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충주부·홍주부·공주부로 나뉘었던 종전의 충청도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분리되었다. 충청남도는 홍주부 관할이었던 22개 군 전부와 공주부 관할이었던 27개 군 가운데 14개 군을 그 소관으로 하면서 공주 지역이 수부(首府)가 되었다. 1901년(고종 38)에는 오천군이 신설됨으로써 이후 충청남도는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가 시행되고 있을 때, 공주부는 27개 군을 관할하고 있었으며, 1896년(고종 33) 13도에서 관할하는 전국의 339개 군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정할 때 공주군은 1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당시 공주 지역은 충청남도의 행정중심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최대 규모의 군이었다.
[변천]
조선 전기에 관찰사제가 확립되면서 관찰사는 중앙의 행정관서와 지방 수령 사이에서 연계적 역할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행정 장관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원래 고려 전기 중앙과 지방의 행정 체계는 중앙과 주현의 직첩체계였다. 국가가 직접 주현에 직결되었고, 그중에서도 외관, 즉 수령이 있는 주현만이 직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면 수령의 수가 많이 증가하면서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수령 장악 방식은 점차 그 한계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십 개의 주현을 포괄하는 도(道)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를 설정하여 도(道)에 파견하는 외관으로 하여금 수령을 장악하도록 체계화하고, 중앙정부는 도의 장관을 장악하는 지방 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제도의 확립은 고려 말기 관찰사제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조선 전기부터는 종5품의 도사(都事)가 수령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수령관은 흔히 아감사라고 불리었으며, 종9품의 검률과 심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관찰사가 도내 큰 고을의 수령을 겸[兼牧]하면서 겸목읍 수령의 자리가 없어지거나 줄었으며, 관찰사의 겸목 업무를 보좌·대행하기 위한 판관이 설치되었으며, 군정 사무를 보조하기 위한 중군(中軍, 정3품)이 배치되었다.
8도에 파견되던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일시적으로 부(府)에 관찰사가 파견되다가, 다시 13도로 개편되었다. 1910년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관찰사와 관찰부 제도는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관찰사와 관찰부가 공주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공주 지역이 명실상부한 호서 지역의 중심 고을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감영이나 관찰사에 대한 내용을 통해 충청도의 연혁과 도명의 변경 등 조선시대의 외관 파견 등의 실태를 파악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