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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746
한자 吳百齡
영어음역 O Baekryeong
영어의미역 O Baekryeong
이칭/별칭 덕구(德耉),묵재(默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생년 1560년연표보기
몰년 1633년연표보기
본관 동복(同福)
대표관직 형조참판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이다. 할아버지는 직장 오극권(吳克權)이고, 아버지는 직장 오세현(吳世賢)이다.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참봉 성근(成近)의 딸이다.

오백령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오준(吳竣)[1587~1666]은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명필로 유명하였다. 오단(吳端)[1592~1640]은 예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으며, 둘째 딸을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출가시켰다.

[활동사항]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이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오백령이 자기 몸으로 왜군을 가로막았는데, 왜군이 그의 효심에 감동해서 두 모자를 살려주어 효자로 이름이 났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조정랑을 지냈고, 1596년 이조참의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가 되어 복천군(福川君)에 봉하여졌으며,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6조의 참판을 두루 거쳤으며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廳)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어 성 밖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형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 승정원도승지, 사간원대사간,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승급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에 오백령의 사우(祠宇)가 있다. 1858년에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에 이 사우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백령 사우인 묵재영당(默齋影堂)에는 위패와 영정, 증직 교지가 있고, 사우 바깥쪽에는 영당 중수기가 있다.

1928년 오인영(吳麟泳)이 찬한 「묵재공영각중수기(默齋影閣重修記)」에 따르면, 오백령 영정은 원래 황해도 배천에 있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흥선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자 오철상(吳徹相)오익상(吳翊相)이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오백령의 증직 교지는 1641년(인조 19) 아들 오준의 공으로 좌의정에 증직된 교지이다.

이용자 의견
김** 오백령사우는 묵재영당입니다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주신 내용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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