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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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百齡 |
영어음역 | O Baekryeong |
영어의미역 | O Baekryeong |
이칭/별칭 | 덕구(德耉),묵재(默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이다. 할아버지는 직장 오극권(吳克權)이고, 아버지는 직장 오세현(吳世賢)이다.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참봉 성근(成近)의 딸이다.
오백령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오준(吳竣)[1587~1666]은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명필로 유명하였다. 오단(吳端)[1592~1640]은 예조참의와 형조참의를 지냈으며, 둘째 딸을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출가시켰다.
[활동사항]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이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오백령이 자기 몸으로 왜군을 가로막았는데, 왜군이 그의 효심에 감동해서 두 모자를 살려주어 효자로 이름이 났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조정랑을 지냈고, 1596년 이조참의에 올랐다.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가 되어 복천군(福川君)에 봉하여졌으며,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6조의 참판을 두루 거쳤으며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廳)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어 성 밖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형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 승정원도승지, 사간원대사간,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승급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월굴에 오백령의 사우(祠宇)가 있다. 1858년에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에 이 사우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백령 사우인 묵재영당(默齋影堂)에는 위패와 영정, 증직 교지가 있고, 사우 바깥쪽에는 영당 중수기가 있다.
1928년 오인영(吳麟泳)이 찬한 「묵재공영각중수기(默齋影閣重修記)」에 따르면, 오백령 영정은 원래 황해도 배천에 있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흥선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자 오철상(吳徹相)과 오익상(吳翊相)이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오백령의 증직 교지는 1641년(인조 19) 아들 오준의 공으로 좌의정에 증직된 교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