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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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山縣 |
영어음역 | Gongsan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조선시대 공주목에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배역자(背逆者)가 생겼을 때 강등하여 부르던 이름.
[관련기록]
『인조실록』권 47, 인조 24년(1646) 5월 1일 기사에 처음으로 공산현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공청도(公淸道) 공주목을 강등하여 공산현으로 삼고, 이산(尼山)·연산(連山)·은진(恩津)을 혁파하여 1개현으로 합하여 은산현(恩山縣)이라고 하고, 공청도를 홍청도(洪淸道)로 바꾸고, 전라남도 금산군(錦山郡)을 강등하여 현으로 삼았는데, 모두 역적의 출신지였기 때문이었다”라는 기사가 보이는데, 당시 류탁(柳濯)의 변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하였다.
이외에도 『현종개수실록』권 6, 현종 3년(1662) 3월 26일 2번째 기사에서 “공주목을 강등하여 공산현으로 삼았는데, 전패(殿牌)를 잃은 까닭이었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충청도읍지』에는 “군명(郡名)-웅천, 웅진, 웅주, 회도(懷道), 공산”라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에는 “인조 24년(1646)에 류탁의 변으로 인해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승격되었다. 현종 11년(1670)에 현이 되었고, 숙종 5년(1679)에 현이 되었다가 숙종 5년에 다시 회복되었고, 영조 4년(1728)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영조 13년(1737)에 다시 회복되었다. 정조 2년(1778)에 현이 되었고 정조 11년(1787)에 다시 회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산지』에는 “군명(郡名)-웅천, 웅주, 웅진, 회도, 공산”이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
공산현은 공주의 옛 지명으로 조선시대 공주목에서 강상죄인이나 배역자가 생겨 강등되었을 때 부르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명을 지을 때 소속되어 있는 지역의 명을 따서 부르게 하였는데, 공주는 고려 때부터 부르던 이름에서 목으로 승격되어 불리었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보듯이 공주와 관련 있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목을 현으로 강등하고 공산현이라 부르게 하였다.
몇 년이 흐른 후 공주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시 목으로 승격되는데 공주 같은 경우는 인조 대에서 정조 때까지 여러 차례 강등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변천]
고려 940년(태조 23) 공주라 불렀고, 983년(성종 2)에 목을 두고 관리하였다. 조선 1466년(세조 12)에 진을 설치하였으나 1646년(인조 24) 유탁의 변으로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승격되었다. 1670년(현종 11)에 공산현이 되었다가 1679년(숙종 5)에 다시 회복되고, 1728년(영조 4) 공산현으로 강등되었다. 1737년 공주목으로 회복되었으나 1778년(정조 2)에 다시 공산현으로 강등되었고 1887년 공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는 지명을 짓는 데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충청도의 여러 가지 지명이 탄생하게 된 동기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공주의 공주목에서 공산현으로, 다시 공주목으로 강등과 회복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보며 당시 공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연결시켜 보고 당시의 공주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