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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898
한자 烈女
영어음역 Yeolnyeo
영어의미역 Virtuous Lady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병훈

[정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한 부녀자.

[개설]

열녀란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한 부녀자로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충·효·열 관념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란 형태로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체계화되면서 열녀는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성을 강화해 갔다.

[유형 및 인물]

고령 지역의 열녀 유형에는 남편이 죽자 자결하는 자진(自盡) 유형과 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며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잘 키워 집안을 이루는 수절(守節) 유형이 있다.

1. 자진(自盡)

이영용(李永龍)의 처 김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부가 함께 피난하던 도중 남편이 왜적에게 살해당하자 분기하여 자살하였다. 광해군 대에 정려를 받았다. 곽수강(郭壽岡)의 처 부안김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순절하였다. 이 사실이 고을 내에 알려져 칭찬이 자자하였다. 최흠(崔欽)의 처 박씨는 결혼 20일 만에 남편이 병사하자 식음을 전폐하다 남편 상제가 모두 끝난 후 남편의 허리띠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이 같은 부인의 정절과 남편을 위한 정성을 높이 받들어 열녀비가 세워졌다.

이재복(李載福)의 처 성산배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3년상을 마친 후 자결하였다. 이에 유림에서 정려를 세우고 표창하였다. 배과(裵科)의 처 성산이씨는 화재로 가옥과 사당이 소실되자 시부모와 남편의 신주를 안은 채 순절했는데 신주가 불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특전을 내려 효열정려를 건립하였다. 곽희수의 처 성산이씨는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욕보이려고 하자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절단하고 목을 찔러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 임진왜란 후 현판이 하사되고, 열녀각이 세워졌다.

조상벽(趙相壁)의 처 임씨(林氏)는 지성으로 시부모를 모셨고, 남편이 병들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서 잠시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하지만 끝내 죽게 되자 곧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예조로부터 표창되었다. 정사현(鄭師賢)의 처 창녕조씨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누이이다. 남편이 죽은 후 철에 맞춰 옷을 지어 무덤 앞에 올렸다가 태우기를 3년 동안 한 후 자식들을 모아 놓고 남편의 뒤를 따르고자 한다고 유시한 후 자결하였다. 명종 조에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렬부인 정표가 내려지고 정려가 세워졌다.

조정필(趙廷弼)의 처 진주하씨는 남편의 상을 당하여 3년간 곡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 했고, 시아버지 상을 당해서도 남편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하였다. 3년상을 치르는 제삿날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는데, 영조 때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가 세워졌다. 배준양의 처 한씨는 임진왜란 때 혼자 몸으로 왜적에게 잡혔으나 두려움 없이 절개를 지켜 자결하였다. 광해군 대에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2. 수절(守節)

기용걸(奇龍傑)의 처 경주김씨는 시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곡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므로 가난한 집안 살림이지만 하루에 3잔씩 끊이지 않게 주었다. 어느 해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자,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놓고, 자신은 이제 시아버지를 모시지 못하니 대신 잘 받들라고 이르고는, 손수 지은 수의가 있으니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사용하라고 하고 죽었다. 조범환(曺範煥)의 처 김씨는 남편이 죽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신주를 모시고는, 길쌈을 하여 묘에 석물을 모두 갖추고 죽을 때까지 시묘를 하니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이억구(李億耈)의 처 김씨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수절하던 중 박천생이란 자가 욕심을 품고 뜻을 꺾으려고 하자, 스스로 도끼로 자기 손을 잘라 다른 뜻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이병무(李炳武)의 처 경주김씨는 가난한 집안을 꾸려 나가면서 실명한 남편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눈을 뜨게 하였다. 기원택(奇元澤)의 처 여흥민씨는 시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대접하였고, 본인이 질병으로 죽음이 임박하자 두 며느리를 불러 놓고 베 한 필을 간수해 두었으니 훗날 시아버지 상례에 쓰라고 이르며 극진히 봉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를 고을에서 알고 포상하였다.

곽무성의 처 박씨는 남편이 병에 걸려 임종이 임박하자 손가락을 잘라 연명케 했고 3년을 복상하였다. 이 일이 널리 알려져 정려를 세워 그를 기렸다. 조규승(曺奎承)의 처 오씨는 시아버지가 오랜 병고에 있을 때 인육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먹게 했더니 병환이 나았다. 이 사실을 암행어사 이동언(李東彦)과 예조판서 김정집(金鼎集)이 듣고 찬탄하여 호세(戶稅)를 면제해 주었다.

김세유(金世瑜)의 처 완산최씨는 빈곤한 가정에서 80세 시아버지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었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고슴도치가 특효란 소문을 듣고 정성을 다해 구하려고 애썼더니 우연히 고슴도치가 뜰 안에 들어와 복용케 하여 완쾌되었다. 또한 등창으로 고생할 때는 입으로 빨아 병을 고쳤으며, 입맛을 잃고 꿩고기를 청하자 구하지 못하여 한탄하고 있을 때 꿩 또한 뜰 안에 떨어져 이를 잡아서 상에 올렸다. 얼마 후 해소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할 때, 제비 알이 좋다고 하였지만 구하지 못해 하늘에 빌었더니 제비가 겨울인데도 알을 놓고 가는지라 알을 술에 타서 올렸더니 해소가 낳게 되었다. 끼니를 이을 수 없이 가난해 자기 머리를 깎아서 쌀을 구해 공궤하였다. 이 사실을 유림에서 관가에 상신하여 표창을 받게 하였고 이 행적을 오래 기리기 위해 효부각을 세웠다.

[관련 유적]

대가야읍 지산리 25-31번지창녕조씨 정려비(昌寧曺氏 旌閭碑)가 세워져 있으며, 쌍림면 하거리 산23번지에는 성산이씨 효열비각(星山李氏 孝烈碑閣)이 세워져 있다. 또한 쌍림면 신곡리 산17번지에는 성산배씨 열녀비(星山裵氏 烈女碑), 쌍림면 안화리 262번지에는 전주이씨 효열비(全州李氏 孝烈碑), 쌍림면 하거리 산17번지[학동길 44]에는 고령박씨 열녀문(高靈朴氏 烈女門)이 세워져 있다. 덕곡면 반성리 산15번지에는 성산이씨 효열각(星山李氏 孝烈閣), 성산면 우곡리 산112번지에는 진주하씨·나주임씨 정려각(晉州河氏·羅州林氏 旌閭閣)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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