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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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窯 |
영어음역 | Goryeongyo |
영어의미역 | Goryeong Kil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직리 804-2[개경포로 16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숙도 |
성격 | 제조업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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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96년 2월 |
설립자 | 백영규 |
전화 | 054-955-9449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직리에 있는 도자기 제조업체.
[개설]
가야 토기로 유명했던 대가야의 도읍지이자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는 고령 최초의 무형문화재 토인(土人) 백영규 선생이 운영하는 도자기 제조업체이다. 고령백자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순백 색깔의 백자에 비해 독특한 전통 유약 처리로 다소 검푸른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또 주병, 항아리 위주의 다른 백자와는 달리 사발, 대접 등 주로 밥상에서 쓸 수 있는 그릇류가 주류를 이루었다.
고령백자는 조선시대 때 우수성을 인정받아 임금에게 진상됐고,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이존록(彛尊錄)』에는 1445년(세종 27) 순찰사 김종서(金宗瑞)[1390~1453년]가 경상도 고령에 들렀을 때 당시 현감이었던 김숙자(金叔滋)[1389~1456년]에게 ‘귀현(貴縣)의 사기는 매우 아름답다.’고 칭찬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변천]
1996년 2월 백영규가 선친의 고향인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에 전통 도예원 고령요를 설립하였다. 백영규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막사발의 원류가 가야 토기라고 판단하여 10여 년 동안 가야 토기 재현에 몰두했다. 발굴 현장과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100여 종의 가야 토기를 수집하고, 토기 제작과 연구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발형 기대[바리 모양의 그릇받침], 통형 기대[원통형 그릇받침], 유개 고배[뚜껑있는 굽다리접시] 등을 재현 해내며 결실을 맺었다. 또한 2002년에는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분청사기를 재현하여 발표하였다.
고령요 대표인 토인(土人) 백영규는 1938년 일본 북해도에서 출생했으며, 1945년 부친을 따라 귀국하여 1953년부터 부친에게 전통 도예를 사사하고, 조선 막사발과 분청사기를 재현하였다. 1982년 한국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1983~87년 대구공업대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 신호문화원 초청으로 조선 막사발을 전시하였으며,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초대작가로도 활동하였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고령문화원 이사, 대가야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2000년 경상북도지사 표창을 받았으며, 2008년 보광차문화연구원 후원 올해의 명다기(名茶器)전 봉상(鳳賞)을 수상하였다. 2009년 10월 25일 백영규 대표는 경상북도 문화재평가위원회로부터 무형문화재[조선백자사기장]로 공식 지정되었는데, 이는 고령군 최초의 무형문화재이다. 백영규 대표는 조부[백용준]와 부친[백암이]에 이어 3대째 집안의 가업인 도자기 빚기를 전수받아 도예에 전념해 오고 있다.
2013년 3월 28일 운수면 신간리에서 개진면 직리로 이전하여 고령요 도예전수관을 개관하였다. 고령요 도예전수관은 백영규 도예가의 전통 도예기술을 전승, 보전하고 도예체험과 문화공간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폐교된 직동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건립하였다. 도비와 군비, 자부담 등 약 4억원이 투입되었으며, 전수관 1층에는 전시실, 다도실, 체험장, 작업장이 있고, 2층에는 식당과 숙소, 샤워실, 휴게 시설이 있으며, 별관에는 전통 재래가마와 야외 화장실 등을 갖춰 다양한 문화활동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황]
고령요에서 생산하고 있는 주요 다기들로는 ①헌다잔[불교의식에서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리는 찻잔], ②막사발[조선시대 사발로 질박하여 온화한 질감으로 무공해 막사발], ③가야토기령잔[가야토기 재현품으로 가야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잔], ④ 만학다기[분청다기로서 만마리의 학이 비상하는 모습을 담은 완전 수공 장작불에 구운 작품으로 무공해 다기], ⑤정호다기[막사발 소지로 만든 다기로 질감이 소박하며 그릇에 변화가 잘 가는 전통다기]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령은 도예 산업 발전의 기반이 잘 갖춰진 곳이다.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분청사기 도요지였으며,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까지 청자와 분청사기를 제작한 기산동 도요지와 사부동 도요지가 그 터로 남아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초기부터 광주분원과 함께 백자 및 분청사기의 보존과 재현, 발전의 중심적인 고장으로도 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2006년에는 고령군 덕곡면 백리에서 고령 백자터가 발견되었다. 덕곡면 백리의 가마터는 조선 후기 백자사발을 대대적으로 생산했던 도요지로서 이 도요지는 백영규 대표의 조부가 가족과 함께 1900년 초기까지 고령 백자 사기그릇을 생산하던 곳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백영규 선생은 발굴과 자료 수집을 통해 고려백자 재현에 몰두하였고, 마침내 고려백자 재현에 성공하여 2009년 10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령요 백영규 대표는 문화활동에 대한 공로로 2021년 10월 22일 옥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백영규는 고령 지역의 소박한 백자 사발을 잘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재료 조달부터 성형, 정형, 시유와 전통 가마를 통한 변조 과정이 전통 방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영규의 조선백자사기장 지정은 가야 토기로 유명했던 대가야의 도읍지이자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는 고령 최초의 무형문화재 탄생이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