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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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由來 |
이칭/별칭 | 신거무 장의 유래,신거무의 원한,신거무 장터 유래,신거무 전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현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에 거주하는 김창현의 이야기를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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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에 거주하는 변기섭의 이야기를 채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죽림리에 거주하는 김귀남의 이야기를 채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2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쌍웅리에 거주하는 최봉수의 이야기를 채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에 거주하는 기인호의 이야기를 채록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광주광역시 북구 신용동에 거주하는 김진철의 이야기를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6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6-8 전라남도 장성군편에 수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신거무 장터의 유래」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 |
관련 지명 | 비아장 -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
채록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 |
채록지 | 광주광역시 북구 신용동 |
채록지 |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 |
채록지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죽림리 |
성격 | 설화|원귀설화|지명유래|복수담 |
주요 등장 인물 | 신거무|고을 원님|원님의 아버지 |
모티프 유형 | 죽은 자의 원한을 풀기 위해 세운 장터 유래 |
[정의]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장성군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거무 장터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개설]
이방 신거무가 고을 원님을 농락한 죄로 죽어 원귀(冤鬼)가 되었다. 신거무가 고을 원님을 죽인 다음에 집안까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시키려고 하였는데, 원님 아버지가 용서를 빌고, 신거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시장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2년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에 거주하는 김창현과 변기섭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86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6-8, 전라남도 장성군편에 수록하였다.
1982년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죽림리에 거주하는 김귀남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86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6-8, 전라남도 장성군편에 수록하였다.
1982년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쌍웅리에 거주하는 최봉수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86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6-8, 전라남도 장성군편에 수록하였다.
1989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두정동에 거주하는 기인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1989년 광주광역시 북구 신용동에 거주하는 김진철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가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이방 신거무는 머리도 똑똑하고 능력이 출중하여 웬만한 고을 원님이 당해낼 수 없었다. 심지어 신거무의 농락으로 많은 고을 원님이 죽었다. 이 소문이 한양까지 퍼져서 관원(官員)들이 신거무가 있는 고을 원님으로 가기를 꺼렸다. 담력 좋은 한 관원이 고을 원님을 자원하였다. 원님은 고을에 부임하면 가장 먼저 신거무의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원님이 고을로 부임하기 전날, 원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신거무란 이방을 잘 대우해야지, 대우하지 않고 벌을 주면 도리어 네가 화를 입을 것이니 조심하여라.” 원님은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고을에 부임하자 신거무를 불러 죄를 물어서 죽였다. 신거무는 원귀(冤鬼)가 되어서 원님 앞에 나타났다. 원귀 신거무가 원님의 눈에는 보였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원님은 원귀 신거무의 시달림 때문에 죽고 말았다.
원님의 시신을 실은 상여가 고향집에 도착하였다. 원님의 아버지는 상여 위에 앉아 있는 원귀 신거무를 보았다. 원님의 아버지는 아들의 상여를 집으로 들이면 분명 큰 화를 입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원님의 아버지는 상여를 멈추게 하고, 아들의 시신을 꺼내게 한 다음에 형틀 위에 올려서 매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이놈!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지, 말을 안 듣고 이방[신거무]을 죽였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원님의 아버지는 아들 시신을 때린 후에 원귀 신거무에게 절을 하였다. 원귀 신거무는 원님의 아버지가 자기를 대신해서 한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고, 원님 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원귀 신거무는 원님의 아버지에게 소원이 있다면서, 고을 관가 옆에 신거무장[시장]을 세워달라고 하였다. 원님의 아버지는 고을 관가 옆에 시장을 세워 신거무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신거무장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신거무장이 저녁에 폐하면, 가장 늦게 가는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신거무장은 일찍 열고, 일찍 파장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거무장 파하듯이 한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에 있던 신거무장이 지금의 비아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신거무 장터의 유래」는 원귀설화이며, 지명설화이다. 이방 신거무가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믿고 고을 원님을 농락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후임 원님이 죄를 다스린다는 명목으로 신거무를 죽였으나, 신거무는 원귀가 되어서 원님에게 복수한다. 원님의 아버지가 기지를 발휘해 원귀 신거무의 한을 풀어주고, 신거무를 위해 시장을 세운다. 「신거무 장터의 유래」는 광주광역시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장성군에서도 전승되고 있다. 신거무의 이름 유래를 후백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에게서 찾기도 한다. 다른 각편에서 고을 원님의 아버지로 역사적 실존인물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나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1493~1582]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지역성이 반영된 현상이다. 「신거무 장터의 유래」는 내용상 원귀설화의 특징을 지니지만, 화소(話素)와 이야기 구조에서 일반 원귀설화와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