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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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珍-緣由-武揚書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박효주 |
[정의]
고려 전기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자리한 탐진최씨 문중이 세운 서원.
[개설]
무양서원은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고려 인종대 인물인 최사전(崔思全)[1067~1139]을 주벽으로 최사전의 후손인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와 손암(孫菴) 최윤덕(崔允德), 문절공 유희춘(柳希春)[1513~1577], 충렬공 나덕현(羅德憲)[1573~1640]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무양서원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음력 9월 6일에 제향이 이루어진다.
[무양서원의 주벽(主壁), 최사전]
최사전은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시조로 고려 중기 내의(內醫)이다. 최사전에 대한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기록되어 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최사전은 처음에 내의로 등용되었으나 여러 번 승진하여 소부소감(少府少監)이 되었다. 예종(睿宗)의 등창[背疽]을 가벼이 여겼다가 예종이 승하하자 도형(徒刑)을 받았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척준경과 이자겸을 제거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공을 인정받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진되었으며 이후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叅知政事判尙書刑部事)로 옮겼다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최사전이 1139년(인종 17)에 73세로 사망하자 인종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부의를 본래보다 더 많이 주었으며 시호는 장경(莊景)이라 하고 인종(仁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최사전의 후손들은 본관을 탐진(耽津)으로 하였으나 전화(戰火)로 인하여 문헌이 실전되어 최사전을 시조로 하였다.
한때 최사전이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해주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의 증손이자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라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최사전의 묘소가 도굴되어 묘비명이 나타나 정확한 가계도가 밝혀졌다. 최사전의 조부는 상약국직장 벼슬을 지낸 최철이며 아버지는 장작감을 지낸 최정이다. 삼대가 모두 의술로 벼슬에 올랐고 집안은 탐진[현재 강진]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탐진최씨가 해주최씨에서 분파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최사전 묘지명 반환]
최사전의 묘지명은 일제 강점기에 도굴로 인해 반출되어 일본 동경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21년에 반환운동을 통하여 반환되었다. 탐진최씨 문중이 묘지명을 반환받은 경위를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상세한 경과를 확인할 수 있다. 최사전의 묘지명이 일본에서 반환되는 사건이 무양서원이 건립되는 시발점이므로 최사전의 반환 내역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4일자 3면에 “麗朝功臣 崔思全의 「지석」을 찻고자 자손들이 일어나서 크게 운동하는 중, 지석(誌石)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있다” 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서 개성 장미산(薔薇山)음을 총독부에서 발간한 금석총람(金石總覽)에서 확인하고 동경대에 반환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탐진최씨 문중이 결의하였다는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탐진최씨가 시조로 모시고 있는 최사전의 묘지명을 찾기 위하여 일본에 강력한 대응을 하고자 함을 엿볼 수 있다.
1921년 5월 3일 동아일보에는 고려 공신 최사전 장경공의 묘지석이 동경제국대학교에 감추어진 것을 안 탐진최씨는 그 지석을 찾아내기로 하였고 대학 총장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전라남도청에서 원조하여 학교로 공문을 보내었고 제국대학교에서 묘지석을 환부하겠다는 공문을 전라남도청을 거쳐 최씨종회소로 보내었음이 기사로 실렸다. 당시 반출된 유물에 대한 반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탐진최씨 문중의 노력과 더불어 전라남도청의 강력한 대응이 큰 성과를 냈다.
같은 해 11월 25일 동아일보에 “팔백년 전의 고지석, 최사전의 자손에게 광주군청에서 인도”라는 기사가 실렸다. 최사전의 묘지명이 일본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반환된 것이다. 기사에는 최사전의 묘지명이 일본에 있음을 알게 된 후손들은 전라남도지사에게 교섭하여 반환을 청원하였으며 동경제국대학에서 광주군청으로 반환하자 탐진최씨 문중이 이를 찾아 당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제각을 짓고 보존할 것이라 하였다.
탐진최씨가 갖은 노력 끝에 반환받은 이 묘지명은 당시 일제 강점기에 수탈된 우리 문화재 중 동시대에 반환된 특수한 사례이다. 탐진최씨 문중은 최사전의 묘지명 반환 사건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서원 건립 논의를 하였으며 1927년 무양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최사전의 묘지명은 1140년(인종 18)에 제작되었으며 가로 36.4㎝×28.2㎝로 앞뒤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되어 보관중이다.
[무양서원 건립]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의 볕인 무진지양(武珍之陽)에서 따와 지어졌다고 서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무양사 현액은 완당 김정희에 의해 순조 10년(1810)에 쓰여진 것으로 강당을 둘러싼 주련에 많은 시구가 있다. 무양서원 안에는 높은 대지 위에 담장을 돌린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삼문인 삼오문이 있어 사우(祠宇) 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서원의 기능은 ‘명현을 제사하는 곳[祠]’ 과 ‘교육을 담당하는 곳[齋]’으로 나누어진다. 탐진최씨 문중은 무양서원에서 선조들을 배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기능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1945년 광산구 쌍암동에 무양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 비아중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여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배향 인물]
무양서원에는 주벽인 최사전을 비롯하여 최사전의 후손 4명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다음에서 함께 배양된 인물을 알아보겠다.
최윤덕은 조선 개국 후 벼슬을 사양하여 광산으로 귀양갔는데 후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 것, 집안에 사당을 세우지 말 것, 토지를 많이 거두지 말 것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최부는 조선 성종 때의 문장가로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며. 나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485년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여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여 칭찬을 받았다. 1487년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다음 해 초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하여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최부가 귀국하자 성종은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최부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이다. 이후 관직 승진에 이 집필 과정에 대한 논쟁이 있어 곤욕을 치르었다.
그 뒤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으며 여기서 6년을 지내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최부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번역본으로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유희춘은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이며, 해남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계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부의 딸로 유희춘이 최부의 외손이다. 153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찬·정언 등에 제수되었다. 1547년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고 그곳에서 19년을 보내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후 선조 때 석방되어 관직에 복직되었다가 1575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사직해 낙향하였다.
외할아버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완심도(玩心圖)』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나덕헌은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이며.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羅士忱)이며 최부의 외손이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현전투에서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금에 여러 차례 사절로 다녀왔으며 1639년 벼슬을 하직한 후 나주로 귀향하여 평생을 살았다.
[무양서원 건물 배치]
무양서원은 무양사(武陽祠)와 동재(東齋)인 성지재(誠之齋)와 서재(西齋)인 낙호재(樂乎齋), 이택당(以澤堂), 합인문(合仁門), 합의문(合義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내 뜰에는 무양서원 조정비가 있으며 비명은 규장각부제학 정안 이병관이 짓고 규장관직제학보덕 민병승의 글씨로 배향된 다섯 명의 약력과 장경공 최사전의 묘지명을 1921년 동경제국대학에서 회수해 온 경위가 적혀 있다.
서원 내부로 들어가면 강당으로 쓰이는 이택당은 입구 옆쪽으로 자리해 있고 이택당 좌우에는 합의문이 있다. 통용문으로 사용되는 합인문을 지나면 성지재와 낙호재가 동재와 서재 역할을 하고 있다.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는 삼오문을 지나면 가장 높은 대지 위에 담장을 돌린 무양사가 있다. 본당인 무양사(武陽祠)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골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 활용 현황과 의의]
무양서원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꾸준한 관리가 되어 있다. 특히 무양서원 뒤쪽으로 무양공원이 조성되어 따스하고 아늑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어 무양서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무양서원 내 작은 도서관이 조성되어 있어 서원의 본래 기능인 교육의 본질을 잃어 버리지 않고 있다.
무양서원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좋은 입지를 활용하여 배움의 장이자 지역 문화 교육의 거점 공간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무양서원의 배향인물인 최사전을 활용한 "무양에서 만난 어의" 프로그램에서는 최사전의 삶과 행적을 체험해 보는 한의학 관련 체험 활동이 펼쳐지고 "무양, 청년 선비" 프로그램에서는 전통적인 서원의 모습을 구성하고 있는 무양서원의 특징을 살려 그림지도를 들고 서원을 누비며 다양한 미션활동을 통해 선비정신을 탐색하는 자유학기제 체험이 이루어진다. "cafe 무양"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은 외국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문화재 공간에서 다양한 한국 전통체험이 진행된다. "무양 백세별곡"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몸, 마음 건강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무양 들락날락"에서는 무양서원 인근 주민들과 마을 공동체를 위한 인문학강의, 플리마켓(flea market), 음악회 등이 펼쳐진다.
무양서원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져 서원의 역사는 짧지만 약탈된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 받은 자긍심과 자부심으로 지어진 공간이다. 기억과 추모, 나눔과 전승을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이 서원이라면 무양서원은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해나가고 있다. 도굴되어 반출된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 일제 강점기의 선조들의 노력들과 이러한 노력을 이어가기 위하여 서원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워 기리는 후손, 남겨진 서원을 활용하여 미래 세대에게 알리는 모습 모두 역사를 지키는 훌륭한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