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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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雲裏影堂 |
이칭/별칭 | 의열사(義烈祠),운리사(雲裏祠),벽진서원(碧津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한백 |
건립 시기/일시 | 1927년 - 운리영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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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996년 - 운리영당 광주 풍암지구 개발로 철거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99년 - 운리영당 재건 및 운리사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8년 - 운리사에서 벽진서원으로 개칭 |
현 소재지 | 운리영당 -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 |
성격 | 서원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 서구 향토문화유산 제2호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서원.
[개설]
2021년 현재 운리영당 명칭은 벽진서원(碧津書院)이다. 운리영당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임진왜란 공신인 (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을 모신 사우이다. 박광옥은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기대승(奇大升)·박순(朴淳)·노사신(盧思愼) 등과 학문 교류를 나누었다.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으며, 지방관으로 부임한 곳에는 향약을 실시하고 향교를 융성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장비와 양식을 지원하였다.
[위치]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1602년(선조 35) 광주 지역 유학자들이 박광옥을 기리기 위하여 벽진서원을 건립하엮고, 1796년 김덕령(金德齡)이 추가 배향되면서 정조로부터 의열사(義烈祠)라는 이름을 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지만, 1927년 박광옥의 영정과 문집·목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운리영당을 건립하였다. 1996년 광주 풍암지구 개발로 운리영당이 허물어지자, 다시 지어서 1999년 운리사(雲裏祠)로 개칭하였고, 2018년 다시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황]
운리영당은 박광옥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의열사(義烈祠)와 강당인 숭본당(崇本堂), 내삼문인 경모문(景慕門), 외삼문인 숭의문(崇義門), 동재, 관리동이 있다. 박광옥의 영정과 문집인 『회재유집(懷齋遺集)』의목판이 있다. 2021년 광주 서구 향토문화유산이다.
[의의와 평가]
운리영당은 광주의 유명한 유학자인 회재 박광옥을 모신 사우로 택지지구에 있어서 도심 속 역사 문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유학자의 삶과 그 뒤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