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397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성환·탁현진

[정의]

1910년 8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국권 강탈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식민통치 시기 전라남도 해남 지역의 역사.

[일제강점기 해남 지역 사회]

일제강점기 해남군의 인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2년 처음 조사되었으며, 당시 해남의 인구는 8만 5663명[남자 4만 3791명, 여자 4만 1872명]이다. 일제강점기 인구 변화를 1915년부터 5년 단위로 살펴보면 1915년 9만 1903명[남자 4만 7185명, 여자 4만 4718명], 1920년 9만 8363명[남자 5만 124명, 여자 4만 8239명], 1925년 10만 5835명[남자 5만 3518명, 여자 5만 2317명], 1930년 11만 1479명[남자 5만 6123명, 여자 5만 5356명], 1935년 12만 4297명[남자 6만 2702명, 여자 6만 1595명], 1940년 14만 2750명[남자 7만 1191명, 여자 7만 1559명]이며, 일제강점기 마지막 통계인 1943년은 15만 4820명[남자 7만 5087명, 여자 7만 9733명]이다.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가장 우선인 산업은 농업이었다. 1930년 해남의 직업별 인구를 보면 농업이 52.1%로 과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무직 43.2%, 기타 2.4%, 상업 1.3%, 공업 0.8%, 수산업 0.5%, 광업 0.2% 순이었다. 무직의 대부분이 농촌에서의 임농(賃農)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해남에서 농업인구는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해남 지역 교육기관]

해방 전 해남에 설립된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 해남공립보통학교[1911년 6월 30일], 달산공립보통학교[1918년 5월 17일], 우수영공립보통학교[1920년 8월 29일], 성진공립보통학교[1921년 9월 15일], 황산공립보통학교[1922년 4월 1일], 옥천사립학술강습소[1922년 4월 20일], 마산공립보통학교[1922년 10월 9일], 북평보통사립학교[1922년 11월 11일], 송지공립보통학교[1923년 1월 1일], 화산공립보통학교[1924년 4월 1일], 산이보통소학교[1927년 10월 5일], 화원공립보통학교[1928년 9월 1일], 어란진심상소학교[1932년 10월 2일], 화원공립보통학교 부설 월호간이학교[1934년 4월 25일], 산이공립보통학교 금호간이학교[1936년 4월 25일], 화산남공립보통학교[1937년 5월 25일], 해남해리공립국민학교 부설 내산간이학교[1938년 6월 15일], 화봉공립심상소학교[1939년 6월 22일], 현산공립국민학교 부설 구산간이학교[1939년 7월 5일], 문내공립심상소학교[1939년 9월 10일], 군곡국민학교[1940년 6월 6일], 북평남공립국민학교[1943년 4월 1일] 등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중등 보습학교로는 해남농업실수학교[1920년 3월]가 유일하게 운영되었다. 한편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남에서는 야학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 6월 당시 해남의 야학으로는 고당강습소[1917년], 맹진여자강습소[1919년], 해남야학원[1921년 5월], 금호강습소[1921년 가을], 상공강습소[1921년 10월], 장춘보통학교[1922년 3월], 남창남녀야학회[1922년], 해남여자야학회[1923년], 고당여자강습소[1924년], 이진학원[동광학원][1925년11월], 운전노동야학회[1926년], 우수영여자야학회[1926년], 연영농림학원[1927년 4월]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일제강점기 해남의 민족운동]

해남군의 3·1운동은 1919년 4월에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 운동이 1919년 4월 6일 해남 장날에 맞춰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11일 해남 읍내 주민들을 중심으로 해남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두 시위는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주동자들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3·1운동 1주년이던 1920년에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우수영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1920년 4월 22일 만세 시위가 있었으며, 화산면에서는 만세 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해남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가장 활발히 전개된 것은 청년운동으로 청년과 유지 등이 계몽, 수양 등을 위해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 소작농 비율이 높았던 해남에서는 농민운동과 소작쟁의도 활발히 일어났다. 이 외에도 근검저축을 강조하는 계몽 계열의 소비조합이 결성되었고,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동조하여 해남 지부도 결성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반도 전역에 사회주의가 확산되었으며, 1930년대 초에는 혁명적 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당시 해남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운동 조직으로는 전남운동협의회를 들 수 있다. 1930년대 해남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김홍배와 오문현은 완도 지역 활동가이던 황동윤, 이기홍과 함께 1933년 5월 14일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전남 5개군으로 확산되어 갔다. 1934년 2월 대대적인 검거에 따라 전체가 발각되면서 와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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