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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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南運動協議會 |
영어공식명칭 | Association for Movement of Jeonna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탁현진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3년 05월 14일 -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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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34년 2월 - 전남운동협의회 경찰 대검거로 와해 |
전개 시기/일시 | 1933년 08월 11일 - 전남운동협의회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로 개칭 |
전개 시기/일시 | 1933년 1월 말경 - 전남운동협의회 해남에서 김홍배가 임농의 임금인상 요구 |
전개 시기/일시 | 1933년 9월~1933년 10월 - 전남운동협의회 김홍배가 북평면 이진리 이진학원에서 소작쟁의 선동 |
발생|시작 장소 | 전남운동협의회 - 전라남도 해남군 |
종결 장소 | 전남운동협의회 - 전라남도 해남군 |
성격 | 항일 단체 |
관련 인물/단체 | 오문현|황동윤|김홍배|이기홍|오홍탁 |
[정의]
1930년대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항일 단체.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중반부터 한반도 내 항일운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1930년대 초 민족주의자들이 항일운동 계열에서 이탈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확대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4차례나 조직되었던 조선공산당이 채 1년도 못 가 연이어 붕괴되었고, 사회주의자 간의 파벌투쟁도 극으로 치달았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에서는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 이른바 12월 테제라고 하는 지침을 내려 기존의 사회주의운동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당 건설 방식은 부정되었고, 아래로부터, 즉 노동자 농민계급으로부터 당을 건설하여야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농촌으로, 공장으로 들어갔고 비합법적 혁명적 노농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해남·완도 지역 운동가들은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기 위해 1933년 1월 10일과 28일 북평면 이진리에서 두 차례 회합을 하였다. 1933년 5월 14일 북평면 성도암(成道庵)에서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를 조직하고, 오문현을 의장, 김홍배를 서기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황동윤(黃同允)[완도군 군외면], 김홍배(金洪培)[해남군 북평면], 오문현(吳文鉉)[해남군 북평면]이 각각 조사부, 사무부, 조직부를 맡기로 하였으며, 이기홍(李基弘)[완도군 고금면]에게 구원부의 책임자가 될 것을 권유하기로 하였다.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1933년 8월 11일 황동윤, 김홍배, 오문현, 이기홍은 대흥사의 심적암 부근에서 제3차 전체 회의를 하고 운동 대상에서 노동자를 제외하고 농민층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명칭을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칭하기로 하였다. 이후 전남운동협의회는 강진, 장흥, 영암으로 확대되었다. 전남 5개군 53개 지역에 각 농민반이 조직되었고, 농민야학, 노동야학 등 28개소가 설치되어 문맹 퇴치와 함께 사회주의사상을 교육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에서 한 활동을 보면 1933년 1월 말경 김홍배가 임농(賃農)의 임금인상을 요구하였고, 9월부터 10월까지 북평면 이진리 이진학원에서 김홍배가 소작쟁의 선동, 선전을 하였다.
[결과]
전남운동협의회의 활동은 1933년 여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강진의 윤가현을 취조하던 도중 실체가 파악되었고, 1934년 2월 대검거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남에서 검거된 사람은 총 558명이었고, 57명이 기소되었으며, 4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열린 판결에서 징역 3년부터 무죄까지 선고되었다. 무죄를 받은 사람을 포함하여 일부는 대구지방복심법원까지 재판이 이어졌다. 이들 중 해남 사람은 오문현, 김아기(金阿其)[북평면], 김암우(金巖于)[북평면], 문희동(文喜同)[북평면], 천덕운(千德云)[현산면], 김홍배, 박태술(朴太述)[북평면], 김용섭(金榕燮)[북평면], 박종기(朴鐘基)[북평면], 오홍탁(吳鉷鐸)[산이면], 오림탁(吳琳鐸)[산이면] 등 총 11명이다. 전남운동협의회의 관련 인물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이 있다.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출신의 오홍탁은 강진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순사였다. 학창시절 사회주의를 공부하였고, 이후 경찰이 되어서도 동지들과 연락하였고, 전남운동협의회 산이면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현직 경찰이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하였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어서 당대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남운동협의회는 1930년대 항일 농민운동, 항일 사회주의운동의 아주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였으며, 해남 지역 참여자들 대부분이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하면서 적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2017년 들어 1930년대 전남의 대표적인 항일운동으로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대한 관심과 명예회복이 요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