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97
한자 吳文鉉
영어공식명칭 Oh Munhy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07월 21일연표보기 - 오문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9년 - 오문현 광주농업학교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오문현 야학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33년 8월 - 오문현 전남운동협의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3년 10월 29일연표보기 - 오문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오문현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출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시면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광주공립농업학교 - 광주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820호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 조직부 책임자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오문현(吳文鉉)[1911~1943]은 1911년 7월 21일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농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 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활동 사항]

오문현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다녔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한 후 1929년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1932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해남에 돌아온 오문현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남 지역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대중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해남 김홍배(金洪培) 등이 주도하여 만든 전남운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지역 조직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 단체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 중 하나였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9개 군 청년들이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成道庵)에서 첫 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소작쟁의 운동과 야학, 무산자 해방운동 등이었다. 1933년 8월에 명칭이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편되었고, 완도(莞島)·장흥(長興)·강진(康津)·영암(靈岩) 등에 지부 조직이 설치되었다.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는 농민운동의 지도 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지에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한 후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오문현은 자신의 고향인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4년 2월에 조직 활동이 발각되었고, 1934년 9월 오문현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오문현은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오문현은 1943년 10월 29일 사망하였다.

[묘소]

오문현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3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2-820호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오문현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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