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해남 추수봉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22
한자 一九四六年海南秋收蜂起
영어공식명칭 Haenam Harvest Uprising in 1946
이칭/별칭 해남 추수봉기,해남 11월봉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1월 11일연표보기 - 1946년 해남 추수봉기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46년 11월 13일연표보기 - 1946년 해남 추수봉기 종료
발단 시기/일시 1946년 9월연표보기 - 1946년 해남 추수봉기 9월 총파업 발생
발단 시기/일시 1946년 10월 01일연표보기 - 1946년 해남 추수봉기 대구10·1사건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년 4월 - 1946년 해남 추수봉기 주동자 오장록 등 검거
발생|시작 장소 1946년 해남 추수봉기 - 전라남도 해남군
성격 농민 봉기
관련 인물/단체 오장록|조동선|김정수|신동기|임건호|인민위원회 해남지부

[정의]

1946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전라남도 해남 지역에서 전개된 농민들의 투쟁.

[개설]

1946년 11월 1일 화원면을 제외한 13개 면에서 1만 3000여 명의 농민들이 일제히 일어나 지서와 면사무소 등을 점거한 1946년 해남 추수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미군정 경찰은 주동자 600여 명을 체포 또는 사살하거나 투옥시켰다. 일제강점기에도 강제 공출과 친일 경찰 때문에 고통을 당한 해남 민중들은 추곡 공출 반대와 소작농 제도 개선, 친일 경찰 척결을 주장하며 일어났다. 1946년 해남 추수봉기는 해남 추수봉기 또는 해남 11월봉기로도 불린다.

[역사적 배경]

1946년 9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주도로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전국적 규모의 9월 총파업이 진행되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군중과 경찰이 충돌하였으며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10월 2일 시민들은 경찰 사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부청과 경찰서를 포위하였고, 경찰과 우파 인물들을 공격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군정을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들을 진압하였다. 대구에서의 항쟁은 미군정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해남에서 미군정은 친일 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며 신뢰를 잃었다. 또 해방 후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한편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면 단위, 리 단위, 마을 단위의 비밀조직을 정비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정의 농업정책 실패로 인해 높은 소작료와 강제 공출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 19일에 천진문 경찰서장과 38명의 경찰을 축출하고 광주에서 파견된 특수경찰 38명으로 해남 경찰을 재조직하였다. 광주에서 파견된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경찰 업무를 맡았던 자들이었다.

[경과]

1946년 11월 11일 저녁 8시경 해남 8개 지역에서 봉기가 발생하였다. 주동자는 오장록(吳長錄), 조동선(趙東善), 김정수(金正洙), 신동기(申東基), 임건호(林建浩) 등과 각 면 단위의 총책들이었다.

1946년 11월 11일 7시 30분 화산면에서는 군중들이 경찰지서를 공격하여 지서가 불탔으며, 경찰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8시 화산면에서도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경찰 한 명이 중상을 입고, 경찰 두 명이 납치되어 폭행을 당하였다. 같은 시간 북평면 경찰지서가 습격당해 지서가 불타고 5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8시 10분경 송지면 월송지서가 파괴되었으며, 경찰 한 명이 죽고 한 명이 부상당하였다. 8시 30분 약 2,5000명의 군중들이 산이면 지서를 습격하여 불태웠다. 시위는 1946년 11월 12일에도 이어졌다. 밤 11시 30분 옥천면 경찰지서에 300명의 군중이 습격하였다. 경찰은 군중들 머리 위로 사격을 하며 위협하였고 결국 해산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새벽 1시 군중 400여 명이 계곡면 경찰지서를 습격하였다. 경찰은 군중에게 발포를 하였고 군중 한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 지원자들이 몰렸으며, 화산면의 경우에는 충남경찰국 기동대 60명, 이른바 ‘충남부대’가 1946년 11월 14일 면소재지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가담자 색출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미군정은 철저한 조사와 가담자 체포를 위해 군정장교 1명, 사병 1명, 그리고 한국인 경찰 1명을 조사관으로 파견하고, 경찰 50명을 추가 배치하였다.

[결과]

1946년 해남 추수봉기 직후 경찰은 몇 개월 동안 주동자를 1명도 검거하지 못하였다. 1947년 2월 새롭게 서장으로 취임한 장춘배는 폭동 특별수사반을 편성하고 각 지서는 물론 인접 군까지 파견하여 가담자들을 검거하였다. 그 결과 김인재, 조동선 등의 주동자가 검거되었으며, 1948년 4월에는 오장록 이하 50여 명의 관련자들이 검거되었다. 1946년 해남 추수봉기와 관련하여 경찰은 좌익, 부역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을 저질렀다. 계곡면 법곡리 월신마을 사건,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사건 등이 발생하였다. 1946년 해남 추수봉기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불신을 낳았고, 그 불신은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1946년 해남 추수봉기는 전남 지역에서 있었던 가장 크고 격렬한 봉기였다. 1946년 해남 추수봉기는 양곡 공출 정책과 양곡 매점, 지주 및 관리와 경찰의 유착, 미군정의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 등에 실망한 해남 사람들이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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