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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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重城 |
이칭/별칭 | 난은별,낭비성,중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선주 |
변천 시기/일시 | 경덕왕대 - 칠중성에서 중성현으로 개칭해 내소군의 영현으로 삼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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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고려 초 - 적성현으로 개칭 |
변천 시기/일시 | 1018년 - 적성현을 내소군 영현에서 장단현 속현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062년 - 적성현을 장단현 속현에서 개성부 속현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106년 - 적성현에 감무 파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38년 -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60년 -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으로 칠중성 함락 |
비정 지역 | 칠중성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일대 |
성격 | 고지명|성 |
관련 문헌 | 『고려사』 |
[정의]
경기도 양주 적성[지금의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 있던 삼국 시대 산성이자 행정 구역.
[명칭 유래]
칠중성(七重城)은 돌을 이용해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는 600m 정도 된다.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을 당시에는 이곳을 난은별(難隱別)이라 했으며, 475년(장수왕 63) 남진 정책의 성공으로 고구려가 한강 유역 일대의 지배권을 확립한 때에는 낭비성(娘臂城)이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한 이래 산성을 쌓고 이곳을 치소성(治所城)으로 삼았다.
[형성 및 변천]
칠중성에서는 임진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임진강 도하를 저지할 수 있었으며, 북방 세력의 남하를 방지하는 길목 역할을 하였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정복한 이래 산성을 쌓고 이곳을 치소성으로 삼아 칠중성이라 하였다. 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며, 660년에는 고구려와 말갈의 공격으로 함락되기도 하였다.
경덕왕 대에 중성(重城)이라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양주와 황해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 초에는 적성현으로 바뀌었으며, 1018년(현종 9)에는 장단현(長湍縣)의 속현, 1062년(문종 16)에는 내속(來屬)하였고 1106년(예종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현재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해발 149m 중성산 정상에 해당한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56, 지10 지리 왕경개성부 적성현]에 따르면, “적성현(積城縣)은 원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인데 신라 경덕왕은 중성현(重城)으로 고치고 내소군(來蘇郡)의 관할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초에 다시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장단현의 소속현으로 되었다가 문종 16년(1062)에 본부[왕경 개성부]에 소속시켰으며 예종 원년(1106)에 감무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