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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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純 |
이칭/별칭 | 자수(子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632년 11월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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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명경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61년 - 전작, 사헌부 감찰, 병조 및 예조 좌랑 |
활동 시기/일시 | 1662년 - 사간원 정언, 춘추관 편수관 |
활동 시기/일시 | 1663년 - 전라 도사 |
활동 시기/일시 | 1664년 -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665년 - 접위관 |
활동 시기/일시 | 1667년 - 평안 도사, 병조정랑 |
활동 시기/일시 | 1673년 - 장령 |
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암행어사 |
활동 시기/일시 | 1677년 - 변무사, 우부승지, 좌부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황해 감사,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79년 - 참지, 우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681년 - 밀양 부사, 파직, 병조 참의, 우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682년 - 형조 참의 |
몰년 시기/일시 | 1683년 2월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16년 - 묘갈 건립 |
묘소|단소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회정동] |
신도비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회정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대표 관직 | 황해감사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수(子粹). 고조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박율(朴栗), 증조할아버지는 산음 현감(山陰縣監) 박천서(朴天叙), 할아버지는 우통례로 좌승지에 추증된 박심(朴 竹+尋),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박수문(朴守文)이다. 큰할아버지는 절사신 교리(節死臣校理) 박호(朴箎)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로 우의정을 지낸 조정(趙挺)의 손녀이고 지중추원사 조유항(趙有恒)의 딸이다.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전창군(全昌君) 유연량(柳延亮)의 손녀이고 응교 엄성(嚴惺)의 외손녀, 참판 전평군(全平君) 유심(柳淰)의 딸이다. 1632년(인조 10)에 태어나 19세에 시집와서 1708년(숙종 34) 10월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장사 박성동(朴星東), 둘째 아들은 진사 박규동(朴奎東), 셋째 아들은 필선 박태동(朴台東)이다. 사위는 정중계(鄭重誡)와 교리 이하원(李夏源)이다.
[활동 사항]
박순(朴純)[1632~1683]은 1652년(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4년(효종 5) 아버지 박수문이 임지인 광주(光州)에서 죽자 부스럼병에 시달리면서도 상례가 끝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아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1657년(효종 8) 명경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듬해 승문원에 뽑혔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르게 되자 가주서(假注書)로서, 기주(記注)[말과 행동을 그대로 기록함]를 담당하였다.
1661년(현종 2) 부묘도감(祔廟都監)의 감조관(監造官)으로서 6품으로 승진하여 전적에 임명되고 사헌부 감찰, 병조좌랑 및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62년(현종 3) 이후 대간(臺諫)이 되어 사간원 정언과 사간을 두 차례씩 역임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지평 2회, 장령 3회, 집의 4회를 하였다. 세자시강원에서는 두 차례 필선(弼善)이 되어 지제교(知製敎)와 삼자함(三字銜)을 겸하였다. 또한 군자감, 봉상시, 제용감, 종부시 정에 임명되었고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1663년(현종 4)에는 전라 도사로 나가 호남의 민심을 얻었다. 1664년 지평, 1665년(현종 6) 여름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왜의 사신을 영접하였다. 1666년(현종 7) 평안도사에 이어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이듬해 담양(潭陽)에서 지냈다. 1673년(현종 14) 가을 장령이 되었고 1676년(숙종 2) 암행어사로 경기 지역을 순찰하였다. 1677년(숙종 3) 변무사(辨誣使)에 발탁되어 정승으로 임금에게 아뢰고 서장관으로 나가 일을 마치고 복명하였다. 이후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고,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승정원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1678년(숙종 4) 봄 황해 감사로 나갔으나 가을에 간관(諫官)이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당했다. 1679년(숙종 5)부터 이듬해까지 참지 세 번, 우승지 두 번을 맡았다. 1681년 밀양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박순에게 앙심을 품은 재상의 상소로 파직당했다. 그 뒤 병조 참의, 우승지에 이어 1682년(숙종 8)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683년(숙종 9) 2월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후포(後圃)에 ‘함취(含翠)’라는 편액을 건 작은 집을 지어 술 마시고, 거문고를 타면서 세상 시름을 덜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회정동[평화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축대 위의 봉분에 호석(護石)을 둘렀고 크고 넓은 묘갈이 있다. 양쪽에 동자석과 망주석이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애도하는 뜻에서 양주시 회정동 산335번지[평화로 1537번길]에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묘지에서 내려다보면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 그 나무가 묘지를 지켜 주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1716년(숙종 42) 8월에 홍문관 대제학 강현(姜鋧)이 글을 짓고, 형조 정랑 남한명(南漢明)이 전액을 쓴 묘갈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