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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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未義兵 |
이칭/별칭 | 후기의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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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단체 | 김상태|박여성|주현삼|조병인|주식선|김운선|주기준|주광식|채경천|김치영 |
[정의]
개항기 강원도 영월 지역에서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조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각국에 특사를 파견하며 외교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즉위시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으로 우리나라의 내정권이 통감부로 넘어가고 부속조칙으로 군대마저 해산당하자 항일 의병 투쟁이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으로 전환하여 강원도와 경기도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거나 여러 의병 진영에 가담함으로써 정미의병에 이르러 의병들의 전투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들이 의병 부대에 근대식 무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전술 및 군사훈련에도 도움을 줌으로써 정미의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 침략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경과]
정미의병기에도 영월 지역에서의 의병 항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박여성(朴汝成), 주현삼(朱鉉三), 김상태(金相台), 조병인(趙柄仁), 주식선(朱植先), 김운선(金雲仙) 등의 의병장이 활약하였으며, 호좌창의대장으로 강원도·충청도·경기도 일대에서 의병대를 이끌던 이강년(李康年) 의병장의 휘하에도 우익장에 김영식(金永軾), 좌익장에 최용출(崔用出), 영솔장에 설창해(薛昌海) 그리고 조병은(趙秉殷)·염중희(廉重熙)·김전영(金田榮)·이명수(李命洙) 등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영월 내에서도 1907년 9월 3일 하동면(下東面) 밀동(密洞)에서 의병 약 100여 명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6일에는 약 4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15명이 사망하였다.
10월 5일에는 새벽 6시부터 약 300여 명의 의병이 영월분파소(寧越分派所)의 수비대를 습격하여 9시간에 걸쳐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영월 지역은 의병들의 중요 공격 대상이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병들이 읍내를 습격하여 가옥 약 3분의 2는 불에 탔고 주민들은 주변 마을로 피신하여 읍내는 종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군수 이하 관리들은 군아를 비우고 피신하였는 데 반하여, 상동면장 남필원(南泌元)의 경우에는 의병에 가담하여 50~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천상면과 북면 일대에서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영월 지역의 의병은 남한강을 통한 수운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10월 18일에는 영월에서 제천으로 향하는 곳인 제천 동방 약 20여 리에 있는 창동리(蒼洞里) 부근에서 약 80여 명의 의병이 제천으로 가던 연락병을 습격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11월 들어서는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영월로 이동하며 충청북도 영춘군 동면 의풍동(義豐洞), 곧 영월·영춘·순흥의 경계 지역과 영월 하동면 거석리(擧石里)에서 추워지는 날씨에 대비하여 방한용 옷과 군량미를 지원받고 일대는 영춘군 방향으로 이동하고, 일대는 순흥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상동면장이었던 남필원은 정선 동면 매화동(梅花洞) 부근에서 옷과 군자금을 모금한 기록이 있다.
12월에는 주기준(朱基俊)과 주광식(朱光植)이 인솔하는 의병부대 약 300여 명이 19일 횡성군 둔내면 자포동(自浦洞)에서 격전 후 평창군 봉평면과 대화면으로 이동하였다가 횡성 안흥을 거쳐 20일 영월 수주면 강림동(講林洞)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대를 추적하여온 일본군 수비대가 습격하여 약 1시간 30분간 격전을 치렀고, 이 전투로 의병 약 70여 명이 사상당하였다. 12월 24일에는 정해창(鄭海昌)과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 200여 명이 영월 서면 광탄리에서 저녁을 먹고 밤 10시쯤 서면 전동(錢洞)으로 이동하여 광탄리·자량(紫梁)·오목리(梧木里) 남쪽에 잠복하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 7시 30분쯤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치른 후 주천으로 이동하였다.
1907년 말 영월을 비롯하여 원주·횡성·평창·정선 등지에서 활동하는 의병 총수는 약 5,000~6,000명으로 각지에서 200~400명가량씩 부대를 이루어 이동하며 겨울철을 대비한 방한복과 군량미를 확보하고 일본군의 연락 업무를 맡고 있던 우편취급소를 기습하는 등 항전을 이어 갔다.
1908년 들어서는 4월 좌변면 공순원(公順院)에 살던 채경천(蔡敬天)이 70~8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영월·평창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영월읍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4월 25일 영월 서쪽 3리 반쯤 떨어진 곳에서 의병 5인과 영월수비대 연락병 간에 총격전이 있었는데, 이 의병들도 채경천 휘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908년 6월 27일에는 이강년의 휘하에 있던 김상태 의병부대의 중군으로 활약하고 있던 조병인(趙炳仁)이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영월 상동면 도화리(桃花里)에서 영월수비대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때 조병인은 총상을 입어 체포되었고, 의병 13명이 사상을 당하였다. 8월 12일에는 영월 동북쪽 약 40리 지점에서 의병 약 40명이 서벽리수비대(西碧里守備隊)와 교전하였고, 8월 16일에는 영월 동쪽 70리 지점에서 의병 150여 명이 서벽리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10월 20일에는 영월 우변면 두덕곡(斗德谷)에 화승총을 소지한 의병 3~4명이 출현하여 군자금을 모금한 기록이 있다.
1909년 2월 16일에는 영월군 우변면 하금마동(下金馬洞)에서 의병 7명이 수렵 활동을 하던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엽총을 빼앗고 제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3월 중에는 관동창의대장 이강년 의병장의 중군장으로 활약하던 김치영(金致永)이 의병 약 50여 명을 인솔하여 영월 관내를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의 사정을 알려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09년 들어 일제의 집중 공격으로 의병들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09년 3월 27일에는 남면 각운리(角雲里)에서 의병 4명이 이한복(李漢福)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한복이 주지 않자 이한복을 포박하여 끌고 이동하다 석방하였다고 한다. 9월 2일에는 영월 우변면 지석동(支石洞)에 있던 의병 약 30명이 사자산(獅子山) 신대리(新垈里)에 거주하던 심정섭(沈正燮)의 집을 습격하여 심정섭의 집에 동거하고 있던 일진회원 길형옥(吉亨玉) 등 3명을 포박하여 끌고 가 길형옥을 총살하고 다른 2명에게는 상해를 입힌 후 평창군 대화면으로 이동하였다.
1910년 초 일제의 첩보에 의하면 영월 지역에는 김상태(金相台) 의병장이 의병 20여 명을 이끌고 영월을 중심으로 원주·횡성·홍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상태는 영월 칠령산(七嶺山)의 산속에 암자를 짓고 거주하며 울산으로부터 박 모라는 탄약 제조 직공을 고용하여 칠령산에서 탄약을 제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5월 20일 영춘주재소 순사들이 영월군 내에서 의병들이 제조 중인 화승(火繩) 약간과 화약의 원료 2두를 압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영월 지역 내에서는 1910년 7월에도 각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보고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6일에도 영월 좌변면 사자동리를 의병들이 습격하였고, 의병들은 영월군을 근거로 평창·정선 지역에서 일본군의 추적을 피하여 지속적인 항쟁을 이어 갔다.
[결과]
정미의병기에도 많은 의병이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하였으나 우리나라는 1910년 8월 29일 결국 일제에 강점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한말 영월 지역의 의병은 일제의 침략을 저지한 항일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표였으며, 독립운동의 이념과 조직, 무장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시금석이었다. 또한 이후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항전의 기틀을 마련한 항일투쟁의 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