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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493
한자 黃嗣永帛書
영어음역 Hwangsayeongbaekseo
영어의미역 Hwang Sayeong's Silk Letter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여진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801년 8월 23일연표보기
성격 밀서
관련 인물 황사영
용도 신유박해 폭로
발급자 황사영
수급자 구베이 주교

[정의]

1801년 황사영이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

[개설]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黃嗣永)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내용과 대응 방안에 대해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거의 체포되었는데, 황사영은 박해를 피하여 서울을 떠나 제천으로 피신하였다. 이곳에 김한빈과 황심을 통해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을 전해 듣고 음력 8월 23일에 빈사 상태에 빠진 조선 천주 교회를 재건하고 위정자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조국을 건지기 위한 방안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음력 9월 29일에 체포됨으로써 「황사영백서」를 압수당했고, 황사영은 궁흉하고 극악한 대역부도라는 죄명을 쓰고 27세 때인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제작 발급 경위]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은 후 귀국하여 이벽(李檗)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시작된 조선 천주 교회는 1795년(정조 19)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생기를 되찾았다. 주문모 신부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 천주 교회가 활성화되면서 조정에서 이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고,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1801년 1월 10일에 정순왕후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여 처벌하라는 「사학엄금교서」를 발행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공적으로 선포하였다. 「사학엄금교서」에는 “오가작통법을 세워 천주교도를 빠짐없이 고발케 하고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률로 다스려 그 근절을 기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교서로 인해 전국적으로 오가작통법이 실시되어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姜完淑) 등 천주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이 모두 순교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마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기에 이르렀으며, 300여 명에 달하는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당시 황심으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황사영은 불타는 정의감과 함께 조선 천주 교회의 생존을 위해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기술하게 된 것이다.

[형태]

「황사영백서」는 가로 62㎝, 세로 38㎝의 고운 명주 폭 위에 매줄 127자, 폭 95자로 된 모두 122행에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의 문서이다. 가는 모필로 쓴 정해자로서 사륙병어체의 격조 높은 문장이다. 「황사영백서」의 형식은 비밀스럽게 휴대를 하고 다니는 자가 관헌의 수사와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입은 옷 속에 꿰매 감추고 다니는 유의배봉의 형식을 취하였다.

「황사영백서」의 수신인은 자세히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단지 ‘본주교대야 각하’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청나라 베이징교구장인 프란치스코회의 포르투갈 사람인 구베아 주교이다. 구베아 주교는 베이징교구장으로서 청나라 황제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으며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의 감정 및 산학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조선 천주 교회는 교황 비오 10세의 위임으로 1831년(순조 31) 조선 천주 교구가 설정되기 전까지 베이징 교구의 관할 아래 놓여 있었다. 사실 「황사영백서」는 정확한 문서로서 구비되어야 할 형식에서 2~3가지의 형식적 결함을 지니고 있는데, 제 24행, 64행, 93행에 문자의 탈루가 있으며, 92행에는 2개의 글자를 말소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문서가 베이징주교에게 보내려던 정본인지, 부본인지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공문서로서의 형식적 결함은 어두운 굴 속에서 호롱불만을 의지하여 1만 3,311자를 쓴 데다가, 10월의 동지사절단에 황심과 옥천희를 보내기 위해 급하게 작성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성/내용]

「황사영백서」는 크게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95년(정조 10) 을묘박해와 1799년(정조 23) 천주박해,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의 교회 사정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면서, 주교의 넓은 자애와 주의 전능함으로써[3행] 참혹한 박해로 빈사 위기에 처한 조선 천주 교회를 구원해 달라고 주교에게 간청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122행] 중 70%를 차지하고 있다. 30여 명의 순교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순교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박해의 전개 과정을 기술한 후 최필공(崔必恭), 이중배(李中培), 김건순(金健淳), 오석충(吳錫忠), 정약종, 최창현(崔昌顯), 임대인, 홍교만, 홍낙민(洪樂敏), 이승훈,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김백순, 이희영(李喜英), 홍필주, 강완숙, 조용삼, 이존창(李存昌), 권일신(權日身), 유항검(柳恒儉), 이안정, 윤지헌, 은언군(恩彦君)의 부인 송마리아와 며느리 신마리아 등의 입교와 모범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또한 1799년(종조 23)의 천주박해 때 신자들의 순교 사실을 서술하면서 1801년 7월에 순교한 9명에 대한 기록, 그리고 1801년 4월 초 김제의 한씨와 전주의 최씨가 순교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특히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열성적인 사목 활동, 의금부에 자수한 내용에서부터 옥중 신문 광경과 순교 사실을 자세히 밝히고 있으며, 주문모 신부의 순교 직후 일어난 기적적인 현상도 서술하였다.

결론 및 대안 제시는 91~122행에 걸쳐 나타나는데, 박해에 의한 교회의 어려운 사정과 박해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하였다. 이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베이징 교회와의 연락, 청나라의 종주권 발동책, 국제적인 재정 원조 요청, 조선 감호책, 대박청래책이 주요 내용을 이룬다.

[의의와 평가]

「황사영백서」는 천주교 박해 시대에 교우들이 베이징교구나 교황청에 청원서를 올릴 때의 형식을 취해 9번 올려진 백서 가운데 원본이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과정을 전하는 이 백서는 구베아 주교의 『조선왕국에 있어서 천주교의 확립』과 함께 조선 천주교사의 여명을 장식하는 쌍벽을 이루며, 초대 교회의 신앙 생활과 박해 상황을 정확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달레의 『조선 천주 교회사』와 더불어 조선 교회사상 커다란 가치를 지닌 귀중한 근본 사료이다.

또한 박해의 배경으로서 당쟁을 강조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 백서가 청국과의 국제적 외교 문제에서까지 이용되고 있어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중요하다.

백서의 형식은 편지이지만 구체적인 목적은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서, 구베아 주교에게 빈사 위기에 처한 조선 천주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강력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황사영백서」의 내용 중 ‘5계책’은 민족 감정상 수긍하기 어려운 점을 내포하고 있어, 이 부분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황사영의 백서가 자신의 안전과 입신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재건과 조선의 구원을 위해 정치 체제에 과감히 도전하였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보다는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게 되었고, ‘조선내복책’과 ‘대박청래책’이라는 대안 방안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황사영백서」는 박해로 인한 대량 학살의 비극을 부당하다고 한 옹호의 텍스트이며, 한국 역사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려고 한 최초의 문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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