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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488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 Sidae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구완회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제천 지역은 제천현과 청풍군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특수 행정 구역이 일부 남아 있었고, 역원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 조선 전기에 이미 지배 집단인 토성이 약화되고 새로운 성씨 집단이 동성 마을을 만들며 주도권을 행사했다. 농업 기반은 약했으며 밭농사를 주로 했는데, 경작지에 비해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다.

[연혁과 행정 구역]

조선 시대 오늘날의 제천 지역은 청풍(淸風)과 제천(堤川)이라는 두 개의 작은 고을로 나뉘어 있었다. 제천은 현, 청풍은 군이었으나 1659년(현종 즉위년) 청풍이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제천과 청풍은 단양군, 영춘현과 더불어 내사군(內四郡) 지역으로 일컬어졌다.

제천과 청풍은 다른 50여 고을과 함께 충청도 관찰사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지만, 지방군의 편제상 단양·영춘·음성·괴산·연풍과 함께 거진(巨鎭)인 충주진의 관할에 속하기도 하였다. 청풍 군수와 제천 현감이 각각 동첨절제사[종4품]·절제도위(節制都尉[종6품])의 진장(鎭將)을 겸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향(鄕)·소(所)·부곡(部曲)·처(處) 등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는 원주 쪽으로 들어가 있는 제천 관할의 가질문촌(加叱文村)·원은촌(原 犾村) 등이 있었는가 하면, 충주의 임내(任內)인 덕산향(德山鄕)[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용바우 근처]과 소을림부곡(所乙林部曲)[덕산면 선고리 선림마을] 등 일부가 남아 있었다.

[교통과 통신]

제천과 청풍의 교통로는 조선 전기 소로(小路)로 평가되었는데, 제천에서 충주로 나가는 교통로 위에 천남역(泉南驛)과 감원역(坎原驛)[제천시 청전동 넉고개] 보통원(普通院)[천남역 부근]·박달원(朴達院), 원주로 가는 통로에 황간원(黃澗院)·둔지원(屯知院)[백운면 평동리] 등이 있었다. 청풍 관내에는 충주로 나가는 길목에 황강역(黃江驛)과 권일원(權一院)·논양원(論陽院)이 있었으며, 제천으로 통하는 길목에 안음역(安陰驛)이 있었고, 황강에서 단양에서 가는 길목에 수산역(壽山驛)과 주병원(酒餠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 중 제천의 천남역, 청풍의 황강역·안음역·수산역 등은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여러 원(院)은 민간 시설이 활성화됨에 따라 사라졌다.

조선 전기 제천의 중심지는 지금보다 서쪽에 있었으므로 봉양에서 신림(神林) 쪽으로 나가는 교통로가 중시되었으며, 평동에서 원주 쪽으로 넘어가는 교통로도 매우 중요하게 간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상 신호 체계인 봉수로는 단령봉수와 오티봉수[오현봉수]가 있었는데, 단양의 소이산 봉수로부터 충주의 심항산 봉수로 이어지는 중간 구실을 하였다.

[지배 세력]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언급되는 제천의 토성(土姓)으로는 안씨(安氏)·지씨(智氏)·석씨(石氏)·강씨(姜氏)가 있었고, 청풍에는 토성인 유씨(劉氏)·김씨(金氏)가 있었다. 이들이 조선 전기 지역 사회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그러나 중앙의 정치적 변동을 계기로 유력한 성씨 집단이 새로 형성되었다. 제천 지역의 경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입향한 성씨로 고려 왕조가 망하면서 낙향한 경우라고 하는 의흥 박씨, 단종의 폐위와 유배를 계기로 입향한 한양 조씨, 사화를 계기로 입향한 경주 이씨진주 강씨, 혼맥을 따라 입향한 것으로 보이는 칠원 윤씨, 새로운 터전을 찾아 온 경우로 보이는 한산 이씨 등이 있으며, 청풍 쪽으로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 있는 강릉 유씨, 그밖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 들어온 영일 정씨·안동 권씨·동래 정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중앙 관계에서의 후광을 입고 지방 수령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서 자리를 잡았으며, 뚜렷한 조상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점차 하나의 마을을 실질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물론 이들 사족 사이에는 혼인을 통한 밀접한 유대가 형성되어 배타적 지배 세력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해나갔다.

[주요 사건]

조선 시대 제천 지역과 관련한 가장 많은 기록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며 특별한 것은 없다. 국가적 관심사가 되었던 주요 사건으로는 먼저 제천 지역에 두 개의 사액 서원이 건립된 것을 들 수 있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에 왕비인 청풍 김씨의 친정아버지 김우명(金佑明)과 그의 형인 김좌명(金佐明)이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면서 1659년 청풍은 도호부로 승격하며 노론 정권의 핵심적 지지 기반이 되었다.

김식(金湜)·김육(金堉)청풍 김씨 출신의 명사들을 배향하기 위해 1671년(현종 12)에 세워진 봉강서원(鳳岡書院)이 이듬해 곧장 사액 서원으로 인정받았으며, 1726년(영조 2) 권상하(權尙夏)를 배향하기 위해 세워진 황강서원(黃江書院) 역시 다음 해에 사액 서원이 된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1787년(정조 11) 남인 출신 김동익(金東翼)·김동철(金東喆) 형제의 역모 사건은 역으로 노론 세력의 지지 기반을 더욱 공고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0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역 사회는 서학, 동학, 의병 등으로 소용돌이 치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 사건이 제천의 배론마을에서 일어났고, 1866년(고종 3)에는 남종삼(南鍾三)이 병인박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1893년(고종 30)과 1894년(고종 31)에는 청풍에서 농민 항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훗날 동학 농민 전쟁으로 이어졌다. 청풍 출신 동학 지도자 성두한의 지도하에 반봉건, 반외세 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1895년(고종 32) 말 이후 제천 지역은 화서학파 선비들이 주도하고 농민층이 참여한 의병 항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는 조선이 망한 이후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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