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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06
한자 -朴達-事緣-
영어의미역 Crossing the Bakdaljae Pass in Tears, Full of Stories
분야 지리/자연 지리,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구완회

[개설]

박달재제천시 봉양읍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제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교통의 요지여서 대외 항쟁사 등 역사의 중요할 길목마다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주변의 역사성 때문에 교통로가 아닌 관광 자원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천등산 박달재가 맞나, 시랑산 박달재가 맞나?]

박달재는 흔히 천등산 박달재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박달재는 정확히 말해서 구학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시랑산 자락에 위치한다. 천등산 박달재라고 하는 가사는 충주의 산척면에 있는 천등산 자락을 넘어가는 다릿재와 혼동하여 생긴 것으로, 제천에서 충주 쪽으로 가려면 박달재다릿재를 차례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혼란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던 박달재 아래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도 활용되었다.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로 보인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박달재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한편, 박달재에는 산적이 자주 출몰해서, 상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는 며칠씩 평동마을에서 머물다가 떼를 지어 넘어갔다고 한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덕암은 도적들이 머물던 근거지로서, 본래 이름은 도적암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외세에 맞서 방패 구실을 하다]

박달재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전쟁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17년(고종 4) 봄 3만 명의 거란군이 남하하여 여름에 제천·충주 근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려 장수 김취려(金就礪)박달재 부근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거란군은 많은 포로와 병기 등을 버려두고 도망쳤다. 이후 고려는 포로들을 공전마을에 모여 살게 했다고 전한다. 1258년(고종 45) 10월에도 고려의 별초군(別抄軍)이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요격하여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해 냈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에 방패 구실을 하던 박달재는 개항기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개항기 제천 지역에 주둔하던 제천 의병이 중부권 20개 고을을 관리하던 충주부를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였으며, 충주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리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도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6·25 전쟁 때는 충주에 주둔하던 미군이 이 고개를 넘어 제천 쪽으로 건너와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비극적인 전쟁 시기의 삶을 그린 오탁번의 「천둥산 박달재」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속에 담긴 사연]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요 중 하나인 「울고 넘는 박달재」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는데, 노래 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선비인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이등령이라 일컬어지던 이 고개를 넘게 되었다. 그때 마을의 처녀를 보고 연모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기약하게 되었다. 금봉은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서울 쪽을 바라보며 도령의 과거 급제와 상봉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서울로 간 박달은 과거에 낙방하여 금봉을 찾지 못하였다. 얼마 후 박달이 금봉을 찾아왔을 때 금봉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박달은 금봉의 환영을 좇아 결국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이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며 ‘박달재’라고 고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한편, 1944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의 마을 장정 13명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날, 동네 부인들이 정성껏 만든 도토리묵을 남편의 허리춤에 달아 주며 고갯마루 서낭당에서 이별했다는 사연이 노랫말로 만들어졌다는 말도 있다.

1948년에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반야월[진방남]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것인데, 박재홍이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005년 한국방송공사의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린 노래를 선정했을 때도 1위로 선정되었다. 그러저러한 인연과 사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 지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 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울고 넘는 박달재」가 명성을 얻게 되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영화도 제작되었다. 1968년 심우섭 감독이 제작한 「울고 넘는 박달재」는 남진·문희·도금봉·허장강·김정훈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악극으로도 제작되었다. 정민섭이 곡을 짓고 박남주가 노랫말을 붙인 「박달재 사연」도 박재란·이미자 등의 가수들이 불러 인기를 얻었다.

[박달재 관광 명소화 작업]

산짐승들이 울부짖던 험한 산길 박달재에 신작로인 이등 도로가 개설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였다. 이후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으나 폭이 5m에 불과하고 경사가 급하여 몇 번씩이나 목탄차가 쉬어 가야 했으며, 겨울이 닥치면 도로가 끊기기 일쑤였고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36년에 도로 개선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비행기재’라고도 일컬어지던 박달재의 사정이 다소 개선되었다.

이곳에 폭 11m의 포장도로가 완성된 것은 1975년 초였다. 이후 점차 자동차가 보급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터널이 필요하게 되어, 국비를 지원받아 1996년 1.96㎞ 공사가 마무리되고, 2003년 말에는 다릿재 구간이 완공됨으로써 제천-충주 간 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이에 따라 박달재는 제천-충주 간을 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박달재가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1996년 종합 관광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박달재에는 도로 포장이 시작되던 무렵 사라졌던 수십 세대의 화전민 대신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낭당이 복원되고, 노래비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동상 등 여러 시설이 세워졌다. 「울고 넘는 박달재」박달재 정상에서 언제나 울려 퍼진다. 아울러 박달과 금봉은 제천시의 마스코트로 채택되었다. 제천시에서는 해마다 ‘박달 가요제’도 개최하고 있다.

그밖에도 박달재 부근에는 여러 주목할 만한 시설들이 있다. 고갯마루에는 애국지사 이용태(李容兌)·이용준(李容俊)의 흉상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1991년에 개장한 박달재청소년수련원이 1년 내내 각광을 받고 있다. 제천시청 산림녹지과에서 관리하는 박달재 자연휴양림은 1992년에 개장한 이래 휴양 시설로 주목받고 있다. 개인이 관리하는 김취려 장군 역사관과 대첩비도 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천주교 성지인 배론, 오탁번 시인이 설립한 원서문학관 등이 있어 수련원이나 휴양림을 찾는 이들이 손쉽게 방문할 수 있다. 최근에는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논란을 빚으면서 제천시와 (주)M캐슬이 박달재 주변 4만여 평의 부지에 대규모 휴양 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듯 박달재는 이제 관광 명소로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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