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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018
한자 -傳統祝祭-吾峙別神祭
영어의미역 Oti Tutelary Deities Rites, a Traditional Village Festival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식

[오티리를 지켜 주던 동제가 제천 지역 문화재로 자리 잡다]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일명 오치마을(五峙마을)]는 수산면사무소에서 청풍·제천 방면 지방도 597호선을 따라 서북쪽으로 1㎞ 남짓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오티리 뒤로 높이 솟아 있는 봉화재는 마치 마을을 내려다보며 지켜 주고 있는 듯한데, 바로 이곳에 마을의 상당서낭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상당서낭에 자리한 서낭신이 마을을 보살펴 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매년 음력 정월 14일이면 산신제를 올리고, 다음날인 15일에는 격년으로 서낭제를 지내고 있다. 바로 이것을 오티 별신제라고 한다.

오티 별신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이자 마을의 전통 축제이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14일의 산신제와 15일의 서낭제를 마치면 오티리의 자연마을인 매차골에서 매차골을 위한 서낭제를 올리기도 한다.

오티 별신제가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 오티리도 제천 지역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마을이 생기면서 곧이어 산신제와 별신제를 지내 왔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오티 별신제는 현재 2년에 한 번씩 행해지고 있다. 60여 년 전까지도 매년 거행되었으나 준비 과정의 어려움과 경비 문제로 인해 상당 서낭신께 2년에 한 번씩 제를 올릴 것을 청하였고, 결국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로 지금까지 격년으로 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오티리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와 새마을 운동의 동제 타파기에도 꿋꿋하게 오티 별신제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의 끈질긴 기질 탓으로 보고 있다.

소박한 마을의 동제였던 오티리의 산신제와 서낭제는 2001년 충청북도 무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제천 지역 마을들의 전형적인 동제의 모습을 보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지속해 온데다, 별신제 속에 녹아 있는 마을 사람들의 삶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마을을 지키는 최고신 산신, 그리고 서낭신들과 본당 신령님]

오티리에는 산신당과 본당 외에 여섯 개의 서낭이 있다.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뒷산 중턱 깊숙한 곳에 산신당이 있고, 마을 한가운데에 본당인 느티나무가 있다. 본당은 모든 신당의 중앙 부분에 해당하는 장소, 곧 마을회관 앞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신목]이다. 신목은 둘레가 6m가 넘는데, 5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티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특별히 아끼고 신성하게 여긴다. 신목 앞에는 자연석으로 된 제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15일에 오티 별신제가 마무리된다. 신목 앞에는 오티별신제보존전승관과 마을회관이 있다.

상당서낭은 오티리 다섯 고개의 최고봉인 봉화재에 있으며, 상당서낭 아래에 작은재서낭이 있다. 그리고 마을의 고개에 해당하는 곳에 각각 구실재서낭, 흰뜨재서낭, 한나물재서낭이 있다. 상당서낭에는 당집이 지어져 있고, 작은재서낭과 구실재서낭에는 매차나무가 심어져 있다. 흰뜨재서낭과 한나물재서낭은 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져서 지금은 마을의 버스정거장 근처 삼거리에서 모시고 있다. 한편 오티리의 자연 마을인 매차골의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에 조그맣게 지어져 있으며, 그 옆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운이 닿고 가장 깨끗한 사람만이 올리는 제]

오티 별신제를 이끌어 가는 제관은 얼마 전부터 오티별신제보존회[2010년 회장 김규칠]에서 선출하고 있다. 제관 선정은 무척 까다롭다. 먼저 그 해의 생기 복덕이 맞는 사람들 중에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고, 또다시 개인 및 집안의 부정 여부를 살피는데, 지난해 집안에서 사망과 출생으로 인한 부정이 없어야 하며, 노약자나 병자, 임산부 등이 있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의 생기 복덕까지 가릴 때도 있고, 심지어 제의 기간 중 여인이 생리를 해서도 안 된다.

일단 제주로 선출되면 개인적인 일로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신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때로는 개인에 따라 복으로 여겨 기쁘게 준비하기도 한다. 오티리의 제주는 그 명칭도 제관, 고양주, 축관, 조역 등으로 나뉘며,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제주 중에 비중이 큰 것은 제물을 장만하는 고양주이다. 이들은 주로 안말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선정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다른 마을에서 선정하기도 한다. 제관은 제를 이끌고, 축관은 독축(讀祝), 고양주는 제의 장소를 청소하고 제물을 마련한다. 이외에 조역은 희생 동물을 준비하고 고양주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고양주는 음력 정월 12일부터 제를 준비한다. 이날부터 고양주는 철저히 금기를 지키는데, 가족들도 이에 따라야 한다. 고양주의 집에는 금줄을 두른다. 금줄을 친 이후 고양주는 바깥출입을 삼가는 등 금기를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고양주 집은 이때부터 신성한 공간이 되기에 마을 사람들의 출입도 금한다.

[신께 바치는 제물, 오티 사람들 최고의 정성]

오티 별신제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께 바치는 제물이다. 이는 곧 제물을 장만하는 고양주의 정성이다. 제물은 때에 따라 종류가 조금씩 달라지지만 떡, 술, 메[밥], 삼색 실과, 포[통북어], 고기[돼지 또는 소]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몇십 년 전까지도 ‘새옹이’라고도 부르던 메는 산신제를 올리는 날 제당 근처에서 직접 지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제를 지내기 3일 전, 고양주는 산신당에 올라 제주(祭酒)를 빚는다. 우선 산신께 예를 올리고[막걸리를 올리고 재배] 술을 빚게 되었음을 고한다. 산신당에서 조금 떨어진 당우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로 고인 물로 밥을 지어 술을 빚는다. 술단지는 짚으로 잘 싸서 산신당 아래 땅을 파서 묻는다. 단지를 묻을 구덩이에는 잿불을 넣어 미리 따뜻하게 해서 술이 잘 익게 만든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단지 묻은 곳에 솔가지를 덮어 놓는다. 이렇게 만든 술은 ‘조라술’이라 부른다. 그래서 제주를 만드는 것을 두고 ‘조라 드린다’ 또는 ‘조라 모신다’고도 한다.

희생 제물은 돼지와 소를 쓴다. 이는 수호신께 바치는 최고의 제물로 지금도 산신께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고, 별신제를 지낼 때 본당에는 황소를 상징하는 소머리 1개와 소족 4개를 올리고 있다. 예전에는 황소를 통째로 바쳤지만 얼마 전부터 마을의 경제 형편상 머리와 다리 네 개만을 올리고 있다.

희생물로 쓸 돼지도 일정한 선정 기준에 의해 마련되는데, 예전에는 정말로 까다롭게 따졌지만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 돼지는 교미 경험이 없고 흰털이 박히지 않은 검은 수퇘지여야 한다. 암퇘지는 절대 쓰지 않는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 선정된 돼지는 ‘거맹이’라고 불리며, 내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산신께 바쳐진다. 거맹이를 사 오거나 산신당 아래로 옮기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고 ‘모신다’고 하여 극진히 다룬다. 조역들은 입에 흰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는데, 돼지를 잡는 동안 농담이나 경박한 행동을 삼가고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조역들은 돼지를 잡는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 또한 조역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이다.

조역들은 일단 돼지를 손도끼로 기절시킨 후 칼로 목을 찔러서 돼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면 손질을 시작한다. 당우물에서 퍼 올린 깨끗한 물을 끓여 돼지 몸에 뿌려 가며 털을 깎아 낸다. 이를 ‘퇴(退) 한다’고 한다. 이후 큰 솥에 돼지를 삶고, 익은 고기를 토막 낸다. 약 다섯 토막 난 돼지를 커다란 그릇에 담아 제장[산신당]으로 옮긴다.

돼지를 산신당으로 옮길 때도 일정한 순서에 의해 부위별로 가져간다. 곧 뒷다리를 먼저 올리고 다음에 몸통, 앞다리, 머리의 순서로 올라간다. 바로 살아 있는 돼지의 모양을 되도록 잘 유지하려는 것이다. 내장은 제물로 올리지 않고 따로 익혀 음복할 때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제를 올리는 시간, 숨죽여 올리는 산신제와 모두가 어우러지는 별신제]

산신제는 음력 정월 14일 저녁 마을 뒷산에 있는 산신당에서 지낸다. 한밤중에 진행되는 엄숙형 제의이기 때문에 제관 일행은 해질 무렵 당에 오른다. 유교식 제의 방식에 따라 제를 진행하고, 마지막에 소지를 올리면서 마을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한다. 대동 소지를 올리고 나면 고양주, 제관, 축관과 각 기관장과 이장, 원로회장 등의 소지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가가호호(家家戶戶)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모두 올리면 음복을 하고 본당으로 내려와 제를 올린다. 본당에서는 단잔(單盞)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으로 비교적 간단히 지낸다. 산신제와 본당제를 마치면 아주 간소하게 수비제[수부제]를 지낸다. 한편 산신제가 끝나면 매차골 사람들이 매차골 서낭제를 올린다.

음력 정월 15일 해가 떠오르고 어둠이 사라지면 마을에서는 풍물 소리가 퍼진다. 곧이어 사람들이 모이면 상당서낭부터 순서대로 작은재서낭, 구실재서낭, 흰뜨재서낭, 한나물재서낭을 다니며 제를 올린다. 제의 방식과 절차는 동일하다. 다만 상당서낭에서는 제를 마치면 수비제를 올리고, 제장을 옮길 때마다 술잔이 하나씩 늘어난다. 상당서낭부터 모든 신령을 본당으로 모셔 오기 위함이다.

서낭을 모두 모시고 본당으로 내려오면 풍물 가락이 최고조에 이른다. 오티농악은 충청북도 북부 지역 쇠가락의 특성을 보인다. 과거에는 제가 끝나고 본당 느티나무 앞[현 오티별신제전수회관 앞]에서 삼동무를 만들어서 놀 정도로 농악놀이가 무척 셌다고 한다. 이를 살려서 충북 민족 예술 경연 대회와 전국 민속 예술 축제에도 출연한 바 있다. 예전에는 별신제를 하는 날 각종 장사꾼들이 몰려올 정도로 근동 사람들이 모두 와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신명나는 놀이의 한마당, 허재비놀이]

오티 별신제를 끝내는 마지막 순간 제액 초복 행위인 허재비놀이를 한다. 허재비놀이는 인형놀이의 원조로서 제웅 쫓기 습속과 관련이 있다. 서낭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따라온 잡신들과 마을 잡귀들을 내쫓는 의식이자 놀이다. 흔히 잡신을 내쫓는 거리풀이라고 한다. 허재비놀이에는 남녀 모양의 허수아비와 수수팥떡을 꽂아 만든 화살, 활과 바가지, 재액을 잘라 낼 칼과 몽둥이가 준비되며, 신명꾼 2~3명이 동원된다. 허재비놀이를 주도하는 놀이꾼을 신명꾼이라고 한다.

먼저 농악대의 농악에 맞추어 신명꾼 두 명이 액운의 상징인 허재비를 손에 들고 춤을 춘다. 이때 제관의 사설에 맞추어 허재비를 서로 어르기도 하고 싸움을 시키기도 한다. 혹은 모의 성행위를 하거나 춤을 추는 등 활발하고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제관은 허재비가 마을의 액운을 모두 가져가 주기를 고사풀이식으로 기원하며 사설을 읊는다. 마지막에 제관은 바가지를 땅에 엎어 놓고, 칼날이 허재비가 있는 방향을 향하도록 땅에 꽂아 놓는다. 이로써 오티마을의 재액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마을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풍물 소리도 더 이상 울리지 않고 고요해진다. 마을은 평화로 온전해진다.

[1년 365일 허투루 대할 수 없는 신령들]

오티리의 다섯 서낭 중 특히 영험하다로 소문난 것이 상당서낭이다. 평상시에도 종종 무속인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고 제물을 떼어 놓고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근동에서는 유명하다. 예전에는 마을 아이들이 상당서낭에 가면 혹 먹을 것이 있을까 하여 봉화재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떡이라도 떼어져 있으면 꼭 절을 하고 주워 먹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늘 어른들께 영험하다고 들었던 서낭님의 음식을 그냥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봉화재 서낭 부근이 명당으로 알려진 탓에 50여 년 전쯤 누군가 조상의 뼈를 묻어 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별신제를 지내던 중 서낭 대잡이가 대를 흔들며 서낭당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낭대를 꽂았다. 무엇인가 부정한 것이 매장되어 있다는 신의 계시였다. 제관들은 그곳을 파는 것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파헤쳐야 하겠느냐고 서낭님께 물었지만 신이 감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동체 축제, 오티 별신제]

오티 별신제는 오티봉수대를 배경으로 행하는 오티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축제이다. 이는 오티마을 사람들이 별신이 드는 해에 봉화재에 있는 상당서낭을 먼저 위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오티봉수대는 통신의 장소인 동시에 제의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봉수대의 원형 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봉수대의 시설물과 함께 당나무를 심거나 해서 참여자들이 바라는 것을 빌었다고 한다. 오티리의 경우 봉화재에 있는 상당서낭은 여느 고개 서낭보다 먼저 섬기는 대상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잘 위하면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명당 터라고도 하면서 여러 서낭 중 봉화재 서낭을 제일 영험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오티 별신제는 봉화 제도의 여건을 바탕으로 풍수적 사고가 보태진 마을 제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티마을은 살 만한 땅임을 마을 사람들 스스로 굳게 믿기에 봉화재 서낭에 대한 정성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오티봉수대와 봉화재 서낭은 정보, 곧 생명과 같은 것을 이어 주면서 마을을 지키는 꼭대기로 마을의 또 다른 영험 형국이었던 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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