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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512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음역 Ilje Gangjeomgi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Regim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완회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의 역사.

[개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여러 사회 간접 자본을 확충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천 지역에서는 항일적인 색깔이 분명한 이범우(李範雨) 등이 주도한 3·1 운동, 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 김학간·김정호 등이 주도한 제천청년회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그밖에도 조순석 등이 주도한 형평 운동과 소작 운동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행정 구역 개편]

경술국치[1910년] 후 행정 구역 개편에서 두드러진 것은 군 통합과 면 제도의 전면적인 실시였다. 1913년에는 청풍군과 충주군 관할의 덕산면을 제천군에 이속시켜 오늘날의 제천시의 틀을 이루었다. 당시 일제는 면제를 강화하여 12개 면, 137개 리로 제천군을 구성하였는데, 12개 면은 읍내면·백운면·성산면·송학면·근좌면·근우면·비봉면·수산면·금수면 등이다. 1917년에는 읍내면이 제천면으로, 금수면과 성산면을 중심으로 금성면이 새로 생겨났고, 비봉면을 중심으로 청풍면이 생겨났다. 또한 1920년에는 종래의 근좌면과 근우면의 거의 전 지역이 봉양면으로 확정되었다. 1940년 말에는 제천면이 제천읍으로 승격되면서 1읍 8면 체제로 정비되는데,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이들 명칭은 거의 그대로 지속된다.

이러한 행정 구역 개편은 전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사무소에는 호적과 토지 대장 문서를 두어 식민지 지배의 첨병이 되도록 하였는데, 유지들을 회유하여 면장으로 앉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회 간접 시설]

일제는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중요한 도로 정비가 마무리되었다. 도로는 그 중요성에 따라 1등 도로, 2등 도로, 3등 도로로 나뉘었으며, 제천을 지나가는 가장 중요한 도로는 충주로부터 제천~평창을 거쳐 강릉으로 가는 2등 도로였다. 제천~평창 간 도로가 완성된 것은 1929년 봄이었다. 그밖에 제천에서 원주, 단양, 수산 등으로 가는 도로는 3등 도로였다.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로서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였다. 1935년에 이미 단양~안동 간 철도 부설이 구체화되었고, 1936년에는 구간 중 가장 어려운 코스인 죽령의 터널을 만드는 공사에 들어갔고, 1939년 여름에 마무리되어 1942년 4월 개통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중앙선 공사가 빠른 속도로 진척됨에 따라 동일은행과 같이 중요한 금융 기관이 제천에 지점을 개설하여 특수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이 은행은 1938년 가을에 개설되었는데, 개점 첫날 24만 원의 예금 유치 실적을 올릴 정도로 지역민의 기대를 모았다. 전기는 1931년 처음 제천면 지역에 가설되어 야간에만 공급되었고, 전화도 1931년 말부터 개통되었다.

[사회 운동]

일찍이 의병활동의 근거지로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은 제천 지역은 일제의 지배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과거와 같이 전면적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계속 이어 나갔다.

무단 통치로 일관하던 상황 속에서 발생한 고종(高宗)의 죽음은 지역 사회를 동요시켰다. 인산(因山)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이범우최린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돌아오면서 시작된 제천의 3·1 운동은 1919년 4월 17일 제천장날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상언(南相彦) 외 세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범우 외 세 명이 체포되어 징역 이상의 실형을 받았다. 당시 이범우는 횡성과 원주에 들러 선언서를 유포하고 단양과 영월의 만세 운동을 독려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만세 운동은 이후에도 송학, 청풍 쪽에서 이어졌다.

1926년 5~6월에 있었던 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 투쟁은 처음에 불량한 교사의 태도가 명분이 되었으나 곧 교장의 부적절한 언행, 즉 순종(純宗)에 대한 불손한 표현, 학생들에 대한 모욕적인 태도 등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제천의 맹휴투쟁은 서울에서 전개된 6·10 만세 운동의 영향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결국 맹휴를 주도한 학생들이 퇴학 또는 무기정학을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일제 지배의 부당함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여름에 시작된 청년회 운동은 강연회, 야학, 운동회 등의 비정치적인 활동에 머물렀다. 그러나 겉으로 표방한 것과는 달리 경찰의 끊임없는 단속을 받았던 것으로 보면 내부적으로는 일제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천 지역 청년회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전개되는 사회 운동, 예컨대 신간회 운동이나 영흥사건, 조선청총 분규사건, 형평 운동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지의 입장을 내놓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주목을 받았던 김정호나 청년회에 맹휴 사건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인 박육경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신극 운동을 전개한 박육경은 문화 활동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킨 경우로 주목된다. 박육경은 화성단이란 연극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내용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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