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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785
한자 鄭澔
이칭/별칭 중순(仲淳),장암(丈巖),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98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13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21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2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29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묘소|단소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산100
사당|배향지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24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일(迎日)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청풍 팔영루의 중건기를 쓴 문신.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시호는 문경(文敬). 정철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감찰 정경연(鄭慶演)이다.

[활동 사항]

정호(鄭澔)[1648~1736]는 충주 출신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촉망받았으나, 1675년(숙종 1) 스승 송시열이 귀양 가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82년(숙종 8) 여러 형제들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생원이 되었고,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경성 판관에 좌천되었다.

1694년(숙종 20) 풀려 나와 사헌부 지평·수찬·교리를 거쳐 1698년(숙종 24)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그 후 동래 부사, 광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을 거쳤다. 1713년(숙종 39) 성균관 대사성에 재임할 때 송시열을 묘정(廟庭)에 배향할 것을 제의하였다.

1721년(경종 1)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肅宗實錄)』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 나와 우의정이 되었고, 사화로 사사된 노론 4대신의 신원(伸冤)을 상소하였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9년(영조 5)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학문과 저술]

송시열의 문인으로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고, 글씨와 시문에 뛰어났다. 문집 『장암집(丈巖集)』과 편서 『문의통고(文義通攷)』가 있다. 그리고 이기홍(李箕洪)의 부탁으로 청풍 팔영루의 중건기를 썼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산100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245번지에 있는 누암서원(樓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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