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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800
한자 安鼎福
영어음역 An Jeongbok
이칭/별칭 백순(百順),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문숙(文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1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3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46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4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7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778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묘소|단소 경기도 광주시 중대1동
성격 문신|실학자
성별
본관 광주(廣州)
대표 관직 중추부 동지사

[정의]

조선 후기 제천 출신의 실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시호는 문숙(文肅). 할아버지는 예조 참의 안서우(安瑞雨)이고, 아버지는 오위도총부 부총관 안극(安極)이다.

[활동 사항]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할아버지가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제천 유원(楡院)에 있던 친척 윤훈갑의 집에 머물던 당시 태어나서 1715년(숙종 41) 서울 건천동으로 옮겨갈 때까지 살았다.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의 상을 당하여 외가인 영광 월산에서 생활하다가, 1719년(숙종 45)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면서 서울 남정동으로 이주하였다. 그 뒤 1736년(영조 12)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였다.

전통적인 남인 계열의 집안으로 다른 남인 집안과 마찬가지로 당쟁에 희생되어 벼슬길이 끊겼으나,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천문·지리·의약 등에 걸쳐 넓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1749년(영조 25) 처음으로 만령전 참봉(萬寧殿參奉)에 부임하여, 내직으로는 사헌부 감찰·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65세에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목천 현감 때 저술한 교화 행정서 『임관정요(臨官政要)』를 몸소 시행하였고, 덕곡리에서 향약을 시행하였다. 만년에는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제수되었으나, 주위 친구와 제자들이 천주교 탄압에 희생되었으며 슬하에 어린 손자·손녀만 남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1746년(영조 22) 35세 때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부터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저서 『하학지남(下學指南)』과 『잡동산이(雜同散異)』에서는 불교·도교와 역사·서학(西學)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걸친 지적인 탐구욕을 잘 보여 준다.

1778년(정조 2) 완성한 『동사강목(東史綱目)』 [20권]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모방하였다고 하지만, 자주적·객관적·실증적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였다. 종래의 중국적 사관에서 벗어나 단군 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사의 상한을 올려 잡았을 뿐만 아니라, 종전에 모호하던 사실을 규명하였고 외적의 침략에 항거한 장수들을 내세워 민족의 활기를 찾으려고 하였다.

이 책은 근대에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 등의 민족사학자의 학문적·사상적인 계몽서가 되었고, 뒤에 문헌 사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였던 성호학파에 속하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비판하였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저술로 『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계갑일록(癸甲日錄)』,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하학지남(下學指南)』, 『열조통기(列朝通紀)』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중대1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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