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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803
한자 金湜
영어음역 Gim Sik
이칭/별칭 노천(老泉),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문의(文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01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1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519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520년연표보기
묘소|단소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풍(淸風)
대표 관직 성균관 대사성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청풍 황강서원에 배향된 인물.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동천(東泉)·정우당(淨友堂), 시호는 문의(文毅). 할아버지는 김질(金耋)이며, 아버지는 생원 김숙필(金叔弼)이다. 손자로 김권(金權)이 있다.

[활동 사항]

김식(金湜)[1482~1520]은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1501년(연산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하지만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후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 등과 함께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임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사림파를 기용하여 정치적 변화를 꾀하고자 하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김식은 형조 좌랑·호조 좌랑·사헌부 지평·사헌부 장령·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시행된 현량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 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 태도 또는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이 있었는데, 급제자 28명 가운데 유일하게 7개 항목 모두를 완벽하다 평가받았다. 이는 김식이 당시 사림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으며, 또 중앙에 이미 진출해 있던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에 버금갈 만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후 신상(申鋿)과 안당이 재차 상계(上啓)하여 단기간에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 11월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대거 축출될 때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본래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비호로 감해진 것이었다. 1521년 신사무옥으로 다시 절도(絶島)로 이배될 처지에 놓이자 거창으로 피신하였다가 「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라는 시를 짓고 자결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해는 저물"어 하늘은 어둑한데[日暮天含黑]/ 산은 비고 절은 구름 속에 있구나[山空寺入雲]/ 군신의 의리 천년을 가는 것[君臣千載義]/ 외로운 무덤 어디에나 둘까나[何處有孤墳]."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식은 당시 사림의 영수로 숭앙받던 조광조와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훈구 세력 제거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와 함께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내용으로는 미신 타파, 향약 실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들 수 있다. 문인으로는 신명인(申命仁)·오희안(吳希顔)·목세칭(睦世秤)·김윤종(金胤宗)·조경(趙瓊)·홍순복(洪舜福)·윤광일(尹光溢)·이세명(李世銘)·신영(申瑛)·김덕수(金德秀)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三牌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 때에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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