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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918
한자 李時振夫婦
영어음역 Yi Sijin Bubu
영어의미역 Yi Sijin and His Wife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관련 유적 효열문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지도보기
성격 효자|열녀
성별 남|여
본관 경주(慶州)|파평(坡平)

[정의]

조선 시대 제천 출신의 효자와 그의 처.

[가계]

이시진(李時振)의 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군수(郡守) 이대수(李大遂)이며, 그의 처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외손녀로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윤면(尹勉)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시진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12세 때 부친이 병석에 눕자 연약한 소년의 몸으로 애써 약을 구하고 지성으로 간호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또 모친의 병환 때는 추운 겨울철에 꿀을 구하여 공양하고,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소생시키는 등 부모를 하늘과 같이 섬겨 효도를 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부모님을 모시고 제천시 금성면의 상악산(上岳山)에 피난하였는데, 왜적들이 부친을 해하려고 하자 앞을 가로막아 대신 살해되었다.

이시진의 처 파평 윤씨는 임진왜란 때 친부모,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피난하였다. 당시 왜적들이 친정아버지 윤면을 살해하고 시아버지까지 해치려 하였을 때 남편 이시진이 대신하여 먼저 살해되자, 쓰러진 남편을 끌어안고 왜적을 크게 꾸짖으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유혈이 낭자한 채 쓰러져 왜적이 이를 보고 놀라 물러가면서 가족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윤씨는 남편을 따라 죽고자 7일간 식음을 전폐하였으나, 시부모가 같이 죽기로 단식을 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후 남편과 아버지의 죽음에 애통함을 억제하며 상례를 다하고, 일편단심으로 절조를 지켜 처신하는 범절이 단정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효도와 지성으로 봉양하고 인덕으로 종족 친척을 대하여 그 감화가 커 고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시진의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왕의 명으로 정려(旌閭)되고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에 효자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시진의 처 파평 윤씨가 1656년(효종 7) 83세로 세상을 떠나자, 1665년(현종 6) 효열각을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현판에는 ‘통덕랑 월성 이시진 처 공인 파평 윤씨 효열문(通德郞月城李時振妻恭人坡平尹氏孝烈門)’이라 하였고, 임호 박수검이 정려비의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제천시 송학면 송한리에 파평윤씨효열문(坡平尹氏孝烈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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