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세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1061
한자 李世榮
영어음역 Yi Seyeong
이칭/별칭 광국(光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완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51년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거주|이주지 충청북도 제천시 두학동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좌의진 좌군장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광국(光國).

[활동 사항]

이세영(李世榮)[1869~1951]은 지금의 제천시 두학동에 살았다. 단발령 이후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고종 42) 정운경(鄭雲慶)이 봉기할 때도 협조하였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에는 이강년(李康秊)이 재건한 호좌의진에서 감군장(監軍將)의 책임을 맡아 활약하였다. 1907년 11월 수차례에 걸친 죽령 전투를 치르고 의진을 재정비할 때 좌군장에 임명되어 영월 상동의 녹전에 주둔하면서 겨울을 넘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된 공세 때문에 영월·영춘 간에서 힘든 전투를 계속 치렀으며, 12월 중순 복상골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의병들이 흩어졌을 때 영월의 광전리 쪽으로 나아가 본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영월 주천의 다래산 전투에서 자신이 이끌던 좌군이 무너지자, 이강년의 북상 대열을 좇지 못하였다. 후에 이강년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김상태(金尙台) 등과 함께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제가 이세영을 압박하기 위해 그의 본가를 불태운 탓에 가족이 단양 영춘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의병을 해산하고 귀가한 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