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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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監理敎 |
영어음역 | Gamnigyo |
영어의미역 | Methodist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현 |
[정의]
1901년 강원도 강릉 지역에 처음으로 개신교회인 강릉중앙감리교회[현 기독교 대한감리회 강릉중앙교회]를 설립한 교파.
[형성]
남감리교회 선교사인 하디(R.A. Hardie, M.D.)[1865-1949] 선교사가 1898년 5월 15일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여 8년이 지난 후 한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전입을 요청하자 쌍방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는 제중원에서 한때 시무한 후 1891년 4월 부산으로 내려가 의료선교에 주력하였고 그 후 1892년 원산으로 사업장소를 옮겼다. 1900년도에 원산구역장 하디에게 영동 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디는 윤성근을 자신의 매서인 겸 전도인으로 채용했다. 하디와 윤성근은 강원도 산골 오지로 다니면서 전도활동에 전념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하디 목사는 1901년 한 해 동안 강원도를 다섯 번이나 순회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강릉중앙감리교회도 이때 세워진 것으로 해석된다.
[변천]
강릉 지방에 가장 먼저 들어온 교파는 미 남감리교회로, 1902년 신자 이동식과 남감리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하디 선교사에 의해 강릉시 명주동에 소재한 명국성 씨 소유의 초가 8칸짜리 집에서 예배와 기도를 드림으로써 강릉에 감리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기도소에서 하디 선교사의 열성에 힘입어 1905년 명국성, 서광우, 안택영, 윤매리, 김도영, 이은혜, 이내의 등 신자들이 자주 모임을 갖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중, 1912년 이 모임의 개척자인 이동식 씨가 목사 안수를 받고 강릉에서 목회를 주관하게 되면서부터 전도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릉중앙교회연혁』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때의 신자수는 20명~50명 내외였다고 한다
1915년 5월에 미국인 모리시이 선교사에 의해 강릉 임정 142번지 기도소 구내에 의숭유치원이 개원됨으로써 복음전파와 영재교육을 담당하게 되는데, 1945년 8월 15일 교회명칭이 강릉중앙교회로 바뀌게 될 때 의숭유치원의 이름도 강릉중앙유치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릉중앙교회의 전신인 강릉예수교 남감리교회가 부흥을 하는 것은 제3대 안경록 목사 때인데, 특히 1919년 강릉 지방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애국지사인 안경록 목사의 지도와 교회 안의 엡윗청년회의 조직이 큰 활약을 하여 일제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큰 부흥을 하게 되어 신자 수는 100명에 이르렀다. 강릉에서 이처럼 3·1만세운동이라는 애국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 데에는 교회 청년회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1900년초 강릉 지역에 설립되었던 사립학교 동진학교와 초당의숙, 화산학교 등에서 공부한 선각자들의 역할도 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15년 영동 지역의 감리교인 수는 『감리교 연회록』에 의하면 입교인 283명, 학습인 225명, 유아세례 91명, 구도인 378명, 목사 5명, 권사 7명으로 되어 있는데, 강릉중앙감리교회의 신자가 100여 명이나 된 것은 당시 강릉 지역의 개신교 전도열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감리교 연회록』에는 1918년에 원주 구역이 관리하는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원주와 강릉 두 구역으로 나눌 것을 결정했음을 밝히고, 이 때 강릉 지역에는 6명의 목사와 9명의 전도사, 그리고 16명의 권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1년 5월에는 강릉 지역 교회 역사상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금학동 22번지에 대지 207평, 건평 67평에 달하는 목조 한식 기와집 예배당이 정식 출현된 사실이었다. 머릿돌에는 ‘구쥬강셩후일쳔구백이십일년 오월 강릉예수교 미감리회당’이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1921년 안경록 목사가 당시 강릉중앙감리교회에 대하여 연회에서 보고한 바에 의하면 “우리의 신축 강릉중앙교회당은 금년 7월말이면 완공될 것이다. 그것은 25칸짜리 건물이다. 구예배당은 유치원으로 사용할 것이다”라고 당시 교회 건축의 현황을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치원은 의숭유치원인데, 1924년 3월 27일 임정 142번지로 이전되었다가 1953년 3월 27일 금정 92번지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강릉에는 145명의 신도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1935년 1월 강릉 예수교 남감리회당은 제10대 한기모 목사 재임 중에 교회이름을 금정교회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이 교회의 박병수, 전승훈 장로를 중심으로 신자 약 70여 명이 이른바 재강파를 형성하여 교권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1936년 6월 10일 강릉읍 대화정 11의 1번지에 대화정 감리교회를 차려 분리하여 나갔다. 대화정 감리교회는 1944년 7월 폐지되었는데 이 교회가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강릉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943년에서 1945년 8·15 해방 전까지 금정교회와 대화정교회가 강제통합되는 진통도 겪게 되는데, 이는 일제가 패전의 기운이 짙게 되자 항공기 헌납 명목으로 대화정교회를 폐쇄하고 매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신사참배 문제 등으로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도에 달해 있을 때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강릉금정교회는 강릉중앙감리교회로 교회 이름을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계에 감리교회가 들어선 때는 1904년 옥계중앙교회가 처음인데, 원산에서 온 선교사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때 교회의 모든 서류가 불타 개척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주문진에 감리교회가 세워진 것은 1910년으로 이해 11월 5일 미감리회 선교사 쿠퍼 목사와 유안나 전도사에 의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도의 가정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기독교 대한감리회 주문진교회의 시작이다. 1930년 건평 20평의 교회를 신축하고 1931년 3월 모루의 선교사 부인에 의해 신성유치원이 개원되어 1996년까지 73회 2,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31년 3월 22일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주문진교회는 강릉 구역에서 주문진 구역이 되었다. 1975년 8월 현 주문3리에 교회당 121평, 유치원 40평을 다시 신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