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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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武寧王陵 |
영어의미역 | Tomb of King Mury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남석 |
성격 |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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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벽돌무덤 |
건립시기/연도 | 백제 6세기 초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
소유자 | 국유|사유 |
관리자 |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공주 송산리 고분군]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
[개설]
무령왕릉은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년]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다. 널길 입구에 놓인 지석(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위치]
무령왕릉이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시 중심부에서 서북방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인 금성동과 웅진동에 연접한 송산소라는 지역에 위치한다. 고분군은 송산의 동남쪽 8부 능선상 해발 75m 정도에 자리한다. 현재 서쪽으로는 곰나루가 있는 금강이 아늑하게 감싸 돌고 있으며, 동쪽에는 공산성이 있다.
무령왕릉은 남사면의 지맥 말단부에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가운데 뒷면에 자리한다. 3기의 고분 가운데 무령왕릉이 최북단에 있고, 여기서 남쪽으로 9~10m 간격을 두고 6호분이 자리하며, 5호분은 여기서 동쪽으로 10m의 거리를 두고 있어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일 송산리 5호 돌방무덤과 6호 벽돌무덤의 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한 보수 공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공사를 위해 6호분 봉토 북측을 제토하는 과정에서 왕릉의 널길부가 노출된 것이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양(梁)나라 지배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벽돌무덤으로 확인되었으며,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묘지석이 발견됨에 따라 무령왕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형태]
무령왕릉은 경사면의 풍화 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널길과 현실(玄室),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한 터널형 벽돌무덤이다. 원형인 분구의 지름은 약 20m이며, 무덤의 상면에 호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잡석으로 쌓은 축석도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였는데,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하여 축조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 암반을 평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을 만들었다.
현실은 장방형의 단실분(單室墳)으로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로 하였다. 따라서 후면의 관대 규모는 동서 너비 293㎝, 남북 너비 315㎝이다. 관대와 바닥의 경계는 벽돌쌓기 차이, 즉 관대와 바닥 전면의 벽돌쌓기는 삿자리문 형태로 장방형의 벽돌을 깔면서 경계에 해당하는 관대 외곽은 벽돌을 길이로 늘어 쌓아 구분한 형상이다. 이 바닥의 벽돌 아래에는 묘실에서 널길을 지나 묘도로 빠져 나가는 배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벽체는 벽돌을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여 구축하였다. 즉, 4개의 벽돌을 뉘어 쌓는 길이모쌓기와 다시 하나를 세워 쌓는 작은모쌓기 방식으로 벽체를 축조하였다. 이러한 벽돌 쌓기 방법은 네 벽면이 동일하나,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둥근 형상이 표현되는 부분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벽돌 쌓기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의 짧은 벽체는 수직으로 쌓고, 동서의 긴 벽은 상단에서 점차 오므려 쌓아 터널형으로 구성하면서 남북의 수직벽은 최상단에서 벽면이 좁아지자 작은모쌓기를 생략하였다. 동서의 긴 벽은 아래부터 6단까지는 동일하나 7단과 8단에서부터는 아치형의 곡선을 표현하기 위해 제형으로 만들어진 벽돌을 사용하면서 길이모쌓기의 벽돌을 줄여 더 큰 곡선을 표현하였다.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했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으며,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에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묘실의 벽면에는 작은 등감이 북쪽에 1개, 동쪽에 2개, 서쪽에 2개 모두 5개가 만들어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가창이 시설되어 있다. 등감은 보주형으로 같은 형태의 벽돌 2개를 맞대어 높이 24㎝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벽돌을 2개 겹쳐 만들어 깊이는 8㎝ 정도이다.
안쪽은 문양이 없는 벽돌을 세워 막았으나, 바깥의 등감 주변은 보주형의 윤곽에 화염문을 채색하였고, 외곽에 당초문 형상의 문양도 남아 있다. 등감의 내부에는 중국제 자기인 등잔이 불에 탄 심지가 있는 채로 하나씩 남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등감의 하부에는 벽돌 9개를 길게 측면으로 세우면서 교대로 능각을 이룬 벽돌을 세워 창살 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현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널길은 규모가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이며,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널길은 묘실의 축소판 형태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 방법도 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천정 이하의 벽면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이 있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은 차이는 있다. 바닥도 묘실처럼 벽돌을 삿자리문으로 깔았으나, 묘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묘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널길의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을 벽돌로 쌓아 304㎝의 높이로 축조하여 널길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무령왕릉에 사용된 연꽃무늬가 있는 것 외에 전범문이란 동전무늬가 있는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널길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널길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의 길이에 이르도록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고분의 축조에 사용한 벽돌에는 사격자의 망상문에 6~8엽의 연화문과 인동문이 시문되어 있는데, 길이모쌓기의 벽돌과 작은모쌓기의 벽돌에 시문된 형태가 다르다. 길이모쌓기의 벽돌에는 망상문과 연화문을 1개의 벽돌 안에 시문했으나, 작은모쌓기의 벽돌은 연화문 반절과 인동문을 배치하여 2개의 벽돌을 맞대어 문양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출토유물]
출토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른다. 중요한 유물로는 널길 입구에서 발견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 2매와 오수전 한 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원래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던 것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했던 장신구들과 부장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한 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관식 1쌍·금제 뒤꽂이 1점·금귀걸이 1쌍·은제 과대 외 요패 1벌·금동 식리 1쌍·용봉문 고리긴칼[龍鳳文 環頭大刀] 1점·금은제 도자(刀子)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은 금제 관식 1쌍·금제 이식 2쌍·금제 경식(頸飾) 2개·은제 팔찌 1쌍·금제 팔찌 1쌍·금은장 도자 2개·금동 식리 1쌍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청동제품으로는 각종 거울·청동제 접시형 용기·청동 완·청동 개·수저·젓가락·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 등잔이 있다. 이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
[현황]
현재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 내에 모형 전시관으로 만들어져 발굴 당시의 모습과 고분의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적은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수많은 삼국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가 되었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역사적 가치가 있다. 백제고분이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완전하게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된 점도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많은 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들은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절대 연대가 확인된 유물은 이후 삼국시대 문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귀걸이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들의 정교한 제작 기술을 통해 백제 미술의 발달된 수준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이라는 중국 남조 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해 당시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 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