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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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聖堂 |
영어음역 | Goryeongseongdang |
영어의미역 | Goryeong Catholic Church of Daegu Diocese |
이칭/별칭 | 천주교 고령성당,고령성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20-1[주산길 10-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천주교 대구교구 소속 성당.
[개설]
1897년 초 신부 로베르가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1899년 초 한국식 십자형 성당인 계산성당을 준공함으로써, 대구와 경상북도 지방의 복음 전파를 위한 안정적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계산성당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자신의 본관을 경주김씨로 바꾸고 대구에 은거하고 있던 한양김씨가 다녔는데, 한양김씨의 후손인 김만득[이냐시오]이 1931년 고령군 대가야읍 고아리로 이주하면서 고령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1936년에는 김옥출[도마], 정말순[요안나] 부부가 칠곡군에서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로 이주해 오는 등 점차 신도 수가 늘어나면서 1940년 김만득의 집을 고령공소로 정하게 되었다. 그 계기는 그해 장병화[요셉] 마산교구 주교의 부친인 장안드레아가 고령에 잠시 거주하게 되면서 신앙생활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장안드레아가 고령을 떠난 이후 1950년까지 공소 활동은 위축되었다.
고령의 천주교가 새롭게 발전하게 된 것은 1955년 화원본당의 박재수[요한] 신부가 고령 지역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박재수 신부는 1958년 그동안 교회 소유의 공소 예절 장소가 없었던 고령 지역에 처음으로 공소[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를 마련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령군에는 곳곳에 공소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변천]
1958년 9월부터 고령본당을 건립할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64년 12월 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26번째 본당인 대구구 천주교회 고령성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대구구 천주교회 고령성당의 신도 수는 약 700명이었고, 관리하는 공소는 13개에 이르렀다. 이후 그리스도의 정신 아래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미래의 세계를 이끌어 갈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한 소화유치원과 조합원의 복지 향상과 지역 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한 고령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활동사항]
대구구 천주교회 고령성당은 고령군의 천주교 신자를 위한 영성 사목과 신자 상호 간의 우호, 그리고 일반인을 위한 선교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신심 단체로 ‘천주성총의 어머니’를 비롯한 총 18개의 쁘레시디움과, 액션 단체로 ‘아브라함회’를 비롯한 총 16개의 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현황]
현재 대구구 천주교회 고령성당에는 안상호[요셉] 본당 신부를 비롯해 수녀 2명과 신도 1,500여 명이 있다. 산하 기관으로는 소화유치원과 고령신용협동조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