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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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田八景 |
영어음역 | Cheongjeonpalgyeong |
영어의미역 | Eight Famous Spots of Cheongje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순긍 |
저자 출생 시기/일시 | 16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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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망 시기/일시 | 1758년 |
성격 | 한시 |
작가 | 김이만 |
[정의]
조선 후기 김이만(金履萬)이 「소상팔경」을 본 떠 제천의 평야 지대인 청전(靑田)의 팔경을 노래한 오언 절구의 연작시.
[개설]
제천시 봉양에서 태어난 학고(鶴皐) 김이만[1683~1758]은 집안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과거에 급제하고도 현달하지 못하고 42세 이후에나 벼슬길로 나가 무안현감, 양산군수, 서산군수 등 지방의 외직을 전전해야 했다. 결국 그는 벼슬살이보다 고향인 제천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제천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그는 ‘학고’라는 호 외에도 제천의 청전 뜰을 따서 ‘청전(靑田)’이란 호도 지어 불렀다. 그 청전의 아름다운 경치를 여덟 수의 연작시로 형상화한 것이 「청전팔경(靑田八景)」이다. 청전은 특히 김이만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제천에서 논농사가 대규모로 가능한 곳이 청전이기 때문에 그곳에 특별히 애착을 가졌다고 전한다.
[내용]
「남산의 난약사[南山蘭若(南山寺)]」
요간벽일색(遙看碧一色)[멀리서 보면 푸른빛 한 색]
종성역난문(鐘聲亦難聞)[범종 소리도 거의 안 들려]
운개일회조(雲開日回照)[구름이 열리며 해가 돌아 비추니]
옥릉유가분(屋稜猶可分)[이제야 집과 논밭이 구분되네]
「북방의 소나무 돈대[北邦松墩]」
기복대야중(起伏大野中)[기복 심한 큰 들판 가운데]
창송열중고(蒼松列衆皐)[푸른 소나무 뭇 언덕에 줄지어 있네]
미지사공돈(未知謝公墩)[관아의 돈대 고마운 줄 모르리니]
역유칠점부(亦有七點否)[칠성산(七星山)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월악산의 아침 구름[月岳朝雲]」
월악만고재(月岳萬古在)[월악산은 까마득한 옛적부터 있어 왔고]
운역무시무(雲亦無時無)[구름도 없던 때가 없었네]
최시수초각(最是睡初覺)[제일 좋은 것, 잠에서 막 깨고 난 때에]
개창간갱수(開牕看更殊)[창을 열고 본다면 더욱 뛰어난 경치]
「지촌의 야화[芝村夜火]」
지촌재아도(芝村在阿堵)[지촌은 바로 저기에 있어]
지격일우명(只隔一牛鳴)[소 울음 들릴 정도로 조금 떨어져 있네]
형형매야화(熒熒每夜火)[반짝반짝 매일 밤 불을 켜놓으니]
반아독서경(伴我讀書檠)[내 책 읽을 때 등잔으로 삼는다네]
「새벽 달의 뿔피리[曉月誰角]」
유인몽초성(幽人夢初醒)[은자 꿈에서 막 깨어났을 때]
산월낙미락(山月落未落)[산에 달이 졌던가 안 졌던가]
천아삼첩성(天鵝三疊聲)[백조가 세 번이나 겹쳐 울어 대니]
지시개문각(知是開門角)[성문을 여는 뿔피리인 줄 알았네]
「석양의 농요[夕陽農謳]」
서교일장석(西郊日將夕)[성 밖 서쪽에 해가 저물려 하는데]
처처상응구(處處相應謳)[곳곳에서 화답하는 노랫소리]
쇠옹와무사(衰翁臥無事)[쇠락한 늙은이 일 없이 누웠으니]
괴이경서화(愧爾競鋤禾)[바삐 김매는 농사꾼들에게 부끄럽도다]
「동소의 붉은 잎[東沼紅蕖]」
착파일휴지(鑿破一畦地)[밭 한 두둑을 다 파내어]
재성천병거(載成千柄蕖)[천 자루 연꽃을 담아 두었네]
시애청전첩(始愛靑錢疊)[푸른 동전처럼 겹친 잎새 사랑스럽더니만]
홀경홍금서(忽驚紅錦舒)[문득 붉은 비단처럼 펼쳐진 연꽃에 놀란다]
「서원의 푸른 잣나무[西園翠栢]」
창창기주백(蒼蒼幾株栢)[푸르디푸른 몇 그루 잣나무]
종래삼십상(種來三十霜)[심은 지 서른 해가 지났네]
육월부지서(六月不知暑)[유월에도 더위를 모를 지경]
하유청석상(下有靑石床)[나무 아랜 푸른 돌 자리가 있다]
[특징]
「청전팔경」은 청전의 아름다운 경치인 ‘남산의 난약사[南山蘭若]’, ‘북방의 소나무 돈대[北邦松墩]’, ‘월악산의 아침 구름[月岳朝雲]’, ‘지촌의 야화[芝村夜火]’, ‘새벽 달의 뿔피리[曉月雖角]’, ‘석양의 농요[夕陽農謳]’, ‘동소의 붉은 잎[東沼紅葉]’, ‘서원의 푸른 잣나무[西園翠栢]’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의의와 평가]
「청전팔경」은 청전의 팔경을 통해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뿐만 아니라 그곳을 터전으로 삶을 영위하는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그렸다. 『학고선생문집(鶴皐先生文集)』의 ‘행장’에 의하면 김이만은 58세 때인 1740년(영조 16) 양산군수로 있을 때 홍수가 심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제방을 쌓아 수재를 막았다 한다. 그 제방은 김이만의 호를 따서 ‘청전제’라고 불린다. 이처럼 백성들의 삶을 깊이 살폈기 때문에 청전의 팔경을 그리면서도 백성들의 삶을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