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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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楊州圈 文化 地理- 中心地 維楊洞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
집필자 | 한정수 |
[개설]
경기도 양주시 불곡산 자락 남향에 위치하는 유양동(維楊洞) 일대가 정치 행정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조선 중종 때부터이다. 그 이전 양주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은 지금의 천보산(天寶山) 자락을 배경으로 한 고읍동 일대였다. 이는 조선 중기 양주의 중심지가 바뀌는 사태가 벌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선택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연산군 시대가 있었다. 연산군은 왕실 공식 수렵장으로서 강무장(講武場)을 설정하였는데, 양주목 지역이 대부분 강무장에 포함됨으로써 양주목이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양주의 중심은 고읍동이었는데, 이러한 영향을 받고 불과 수년 만에 폐허가 되었다.
유양동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이때였다. 중종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불곡산 남쪽 자락 유양동에 양주 관아를 설치하고 향교(鄕校)와 사직단(社稷壇) 등을 둠으로써 새로운 양주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1506년(중종 1)부터 1922년 양주군청이 의정부로 옮겨지기 전까지 양주의 치소(治所) 관아가 유양동에 위치하였으며, 향교·객사(客舍) 등 주요 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왜 유양동인가?]
그렇다면 중종 시대는 왜 태조 대 이래 양주의 중심지였던 고읍동 일대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오히려 손쉬운 방법이었을텐데 말이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 질서를 주축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양주에는 태조가 수양하면서 불공을 올린 절이 있었다. 회암사였다. 한양에서 본다면 공교롭게도 회암사 근처에 고읍동이 놓이게 된다. 절과 관아의 공존은 뜻밖의 결합이었다.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회암사를 피하면서도 새로운 양주 시대를 열 수 있는 명당을 찾는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불곡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을 때 그 답은 금방 명확해진다. 동쪽으로는 천보산맥에서 솟은 칠봉산(七峰山)과 천보산이, 서쪽으로는 감악산(紺嶽山)과 노고산(老姑山) 및 앵무봉(鸚鵡峯)·형제봉(兄弟峰) 등이, 남쪽으로는 상장봉(上將峰)·도봉산(道峰山)·사패산(賜牌山) 등이 솟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불곡산 주변으로는 평탄한 지형이 원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형만을 놓고 봤을 때 불곡산은 어떤 형세에 놓인 지 알 수 있다. 마치 꽃잎으로 둘러싸인 꽃봉오리의 핵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곳이 유양동이었다.
동시에 불곡산이라는 양주시의 진산(鎭山)에 담긴 포용의 기운도 그 속에 있음을 느낄 수도 있다. 더구나 유양동은 ‘유양(維楊)’이라는 명칭에 나타나듯 버들가지들이 실처럼 늘어서서 찰랑이는 곳이 된다. 물과 논, 하천, 그리고 산이 어우러지는 명당으로서의 장소적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선택은 들어맞았다. 그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었다. 즉, 이후 400년 이상에 걸쳐 유양동은 양주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이다.
[되살아나는 대양주권]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된 역사 문화 지리의 전통은 현재를 포함해 미래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싫든 좋든 시간의 흐름은 그러한 과정을 어떤 패턴을 통해서든 구현하고야 만다. 공간 자체가 소멸하거나 교통 지리가 바뀌지 않는 한 그렇다. 과거 양주의 중심은 아무래도 관아가 있던 유양동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400년 이상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 역사는 복원된 양주 관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양주목사들에 대한 송덕비, 향교, 사직단, 옛 지도 등이 확인해 준다.
사실 과거 유양동 시대 양주는 적어도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광진구·성동구·성북구·도봉구·노원구 등을 비롯하여 경기도 남양주시·의정부시·동두천시 등을 포괄한다. 오늘날 범주로 ‘대양주권’이라 부를 수 있다. 지금은 이들 시·군·구 모두가 개별 지방 자치 단체로 독립한 상태로 점점 성장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과거 유양동 시대 양주는 오히려 소외되었다 할 정도로 성장이 멈춰져 있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1922년 군청사를 시둔면[현 의정부시]으로 이전함으로써 유양동의 역사가 단절되게 된 점이다.
하지만 2000년 군청사를 현재의 양주시청 자리로 옮기면서 다시금 유양동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되었다. 마침내 2003년 양주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양주군에서 도농 복합 도시 양주시로 승격된 것이다. 양주시와 양주시민들은 양주의 중심지 불곡산 자락 유양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한강 이북 역사 문화와 행정 교통 지리의 중심지였다는 과거 사실 때문이다.
[21세기! 유양동과의 소통을 시작하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한 지역에 역사 문화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교통이 편리해야 한다. 동시에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지역은 당연히 지리적으로도 사방과 통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행정 중심 도시는 그러한 지리적 위치와 선택을 통해 형성되었다. 여기에 더해 현대의 도로나 철도망 역시도 과거의 도시를 철저히 고려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사업비나 인지도나 접근성 면 등에서 이는 절대적이라 할 정도이다. 더불어 도로, 철도 건설은 인구의 유입이나 상업과 산업의 발달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되는 변화가 유양동을 중심으로 500년 전에 이미 벌어졌었다. 그리고 다시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유양동을 중심으로 도로와 철도가 정비되는 변화를 맞게 된다.
즉, 2000년대 들어서면서 양주시를 중심으로 한 교통 지리망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전철 1호선[경원선]이 연장되면서 양주역·덕계역·덕정역이 세워졌고, 도로로는 국도 3호선이 정비되면서 ‘평화로’가 유양동 곁을 지나간다. 의정부와 고양을 잇는 국도 360호선이 국도 98호선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유양동 시대를 예견이나 하듯 이름을 ‘부흥로’로 하고 있다. 서울 도심과 외곽 도시 등을 연결하는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가 양주시를 통과하면서는 사통팔달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가 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각종 도로와 철도 노선이 유양동 앞에서 만나고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21세기 유양동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의 정비는 인구의 유입과 산업 시설의 유치 등을 수월하게 하고 활기를 유통시킨다. 결국 과거 역사 문화의 전통과 새롭게 전개되는 교통 지리망의 구축은 다시금 대양주권의 형성을 의미할 수 있고, 그 중심으로서 유양동은 새롭게 태어나리라 본다. 비로소 유양동 500년 문화와의 소통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유양동 전통문화의 복원 현장]
유양동은 조선 시대 양주목의 관청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동시에 양주목에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 기관이 있었다. 즉 기보중영(畿輔中營)인데, 양주목사는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겸 중영장(中營將)의 직을 겸임하였다. 그 정도로 군사적 중요성이 있기에 양주목사의 품계는 정3품 혹은 2품에 해당하였다. 조선 시대에 관청이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관사가 입지했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에 나타난 불곡산 아래 양주목 관청을 보면 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관청을 중심으로 우측 옆으로는 사창(司倉)과 향교가 있고 좌측 옆으로는 객사와 사직단이 있다.
관청 뒤쪽 계곡 쪽으로는 금화정(金華亭)[1996년 복원]이 있고 목민관의 마음 다스리기를 뜻하는 ‘관민동락(官民同樂)’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한편 기록에서는 동헌 뒤편으로 사대(射臺)가 있었다 한다. 정조 임금이 3일간 머물면서 여기서 활쏘기를 하고 지방민을 위로하는 윤음(綸音)을 내린 바 있었다. 이를 기념하는 어사대비(御射臺碑)가 여기에 세워져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외에도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氷庫)가 현 유양초등학교 남쪽 건너편의 핑구재 아래에 있었다. 백화암(白華庵)이 불곡산 자락에서 부처를 위하고 있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적 임꺽정의 생가는 백화암 위에 있다.
과거의 유양동은 이러했으나 아, 어즈버 태평연월이여! 세상은 변했고 유양동의 떠들썩한 소리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양주시민들은 다시 손을 걷어붙였고, 불타 버린 향교의 명륜당을 복원했다. 양주 관청의 정청이었던 해학당도 다시 세웠다. 모두 그대로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차후 숙제로 남겼다. 금화정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관청 중심이었던 이곳에 양주의 슬픔과 즐거움의 춤과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양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전 양주목사에 대한 송덕비들을 모았다. 이외에 앞으로 관청과 사창, 객사, 빙고의 완전 복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경기도에서는 유일하게 조선 시대 지방 관아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으려만, 그것이 언제가 될는지는 높이 나는 새에게나 물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복원 현장은 고스란히 유양동에 흩어진 향나무 및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이 마치 CCTV라도 되는 양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양주권 유일의 유양동 문화]
2000년 9월 양주군청이 현 의정부시 쪽에서 옮겨 오고 2003년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양주의 역사는 큰 분수령을 넘게 된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공교롭게도 대양주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옛 양주 관아지가 있는 유양동 원골마을은 더욱 활력을 찾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자가용으로, 버스 등 대중교통으로, 전철로 양주시를 들어선다. 양주역에서, 국도 3호선 평화로에서, 부흥로에서 사람들이 아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당연 우뚝 솟은 불곡산이다. 두 개의 바위 봉우리가 마주보며 서 있는데 마치 두 분의 부처가 마주한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산 이름을 불곡산이라 한 게. 그런데 산을 바라보는 순간, 그 수려한 불곡산 자락으로부터 큰 울림이 전해진다. 이 울림은, 이 느낌은 무엇일까?
내심 헤아려 보건대 양주향교에서 공부하는 학동들이 내는 소리일까? 어사대(御射臺)에서 옛날 정조 임금님이 활쏘기 할 때마다 탄성을 지은 그 소리의 울림일까? 천년 고찰 백화암에서 울리는 법어일까? 임꺽정 생가에서 나오는 의적들의 함성일까? 양주별산대놀이마당에서의 웃음소리일까? 아니면 양주시청에서 나오는 함성일까? 보고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소리는 지나가는 바람 소리일 수도, 함성일 수도, 종소리일 수도, 산이 내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흥로에 접어들어 귀 기울이면 분명해진다. 그것은 유양동에 위치한 그 모든 것의 울림이 된다. 억겁의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불곡산의 소리. 천년 고찰과 400여 년의 유양동 시대의 역사 문화. 유양동 시대가 마감되어 정지되었던 동안의 독백같은 울림. 새로이 시작되는 21세기 유양동 시대의 갈망. 이들이 합쳐져 울림이 되고 파문이 되고 파도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그들은 유적이 되었지만 지금의 그들은 전통문화이다. 과거라는 역사가 있었고 그 위에서 어울려진 삶의 즐거움과 슬픔, 괴로움과 기쁨 등이 있었기에 대양주권에서 유일한 전통문화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조화, 유양동-양주1동]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기도 하다? 분명치 않으면서도 때로는 확연하게 와 닿는 말이다. 불곡산 아래로 양주목 관청과 향교를 비롯한 모든 것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는 약간 우측 옆에 떨어져 있지만 양주시청이 웅장한 기세로 서 있다. 과거에는 관청을 중심으로 행정과 군사, 상업 등이 모두 이루어졌다. 물론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면이 있으나 그보다도 문화 공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과거 교육 문화 공간으로서 향교가 있었다 한다면 지금은 그 옆으로 양주별산대놀이마당과 전수회관이 우뚝 서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유양동 시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단언을 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자신감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그동안 양주목 혹은 양주군에 속했던 행정 구역의 독립과 발전을 양주는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기로 치자면 차(車) 떼고 포(包) 떼고 상(象)과 궁(宮)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양주는 끊임없이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2011년 현재 양주시의 인구가 20만 명을 넘어서 가고 있다. 철도와 교통로가 유양동과 직접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행정 구역 개편으로 유양동은 양주1동으로 편제되었으나 유양동은 유양동이리라. 불곡산 빛을 받고 실버들이 너울대며, 신명나는 삶의 숨결이 춤사위로 수놓아지는 곳, 새롭게 부상하는 대양주권의 문화 중심지 유양동이 이제 막 그 역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