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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23
한자 金溱默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연표보기 - 왕회종과 의병 부대를 꾸려 적성·삭령·안협·토산 일대에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조인환·권준 등의 의병 부대와 합류
활동 시기/일시 1908년 이후연표보기 -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 활동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양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의병 부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김진묵(金溱默)은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태어났다. 김진묵은 일제가 1907년 우리 민족의 군사무력(軍事武力)을 약화시키기 위해 7월 20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고자 결심하였다.

김진묵은 1907년 의병장 왕회종(王會鍾)의 부장으로서 500여 명을 지휘하여 금성(金城)·괴산(槐山)을 점령하였고, 평강(平康)·신계(新溪) 등지에서도 유격전을 펼치는 등 더욱 훌륭한 전과를 올렸다. 경기도 삭령(朔寧) 일대에 집결하여 진을 치고 있을 때 의병 운동의 확대를 위하여 정미경기연합의진(丁未京畿連合義陣)을 기획하고 총대장으로 당대의 거유(巨儒) 허위(許蔿)를 초빙하였다. 이 계획이 적중하여 인근 의병 부대의 의병장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황순일(黃淳一)·황재호(黃在浩)·박종한(朴宗漢)·김준수(金俊洙)·이종협(李鍾協)·이홍응(李弘應) 등을 규합할 수 있었다.

1907년 9월 중순 왕회종·김진묵 의병 부대는 적성(積城)·삭령·안협(安峽)·토산(兎山)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의병이 줄어들자 이곳 주민들이 자진 응모하여 그 수가 4백여 명에 달하였다. 특히 김진묵의 부대는 일본 보병 제52연대 1중대와 대치하며 적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초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서울 진격이 무산되자 그 주력 부대는 조인환(曺仁煥)·권준(權俊)·김진묵의 의병 부대와 합류하여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였다. 이곳으로 합류한 박종한·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李殷瓚) 등의 의병 부대들은 허위를 총대장으로 삼아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허위를 총대장으로 한 의병 부대들은 대내적으로 전국 의병 부대의 연합 전선을 재차 모색하는 한편 지평·가평·적성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중국 혁명당에 경현수(慶賢秀)를 파견하여 군사 원조를 청하는 밀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허위는 의병 부대 연합의 꿈을 실현하기 전에 1908년 6월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유동(柳洞)에서 체포되었고, 1908년 10월 서대문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하지만 김진묵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1908년 말까지 인천(仁川) 일대에서 집중 활약하였다. 확실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일제의 ‘폭도 토벌 작전’이 극에 달하여 의병 활동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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