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59
한자 六二五戰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휴전협정 체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윤명운|김해수|석상익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개된 6·25전쟁 기간 중 영월의 상황.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영월에서는 개전 초기부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초기 이 전투를 이끈 주역은 경찰이었다. 1950년 7월 이래 전투경찰 제8대대가 중심이 되어 북한군을 상대로 분전하였는데, 전력의 열세로 영월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월에서는 전쟁 기간 중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주도한 이들 역시 경찰이었다. 영월경찰서에 갇혀 있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외 미군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 희생도 잇따랐다. 하지만 1953년 7월 27일 휴전과 함께 영월은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어 활발한 전재 복구에 착수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중국과 소련의 지지를 얻은 북한은 삼팔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그 결과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고,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다. 유엔은 6월 27일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파병하였다.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어느덧 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긴 다음 3월 15일에 재탈환하였다. 이후 전선이 고착화된 가운데 1951년 7월 유엔군과 중국이 휴전을 희망하게 되었고, 이를 반대하던 이승만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결국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그동안의 쟁점이었던 군사분계선 문제와 포로 교환 문제가 해결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게 되었다.

[경과]

6·25전쟁 개전 초기 영월 방면에서는 수비를 담당한 경찰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당시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북면 마차리를 향하여 침공하여 왔고, 동해안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에 침투하였던 북한군 유격 부대도 측방과 후방을 위협하였다. 이에 영월과 울진을 제외한 강원 지역의 전 경찰서는 북한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하여 국군과 함께 철수하게 되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강원도경찰국 비상경비사령관 윤명운(尹明運) 경무관은 사령부를 제천으로 이동시키고,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철수 경찰 병력을 수습하여 영월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윤명운은 즉시 강원도경찰학교장 김인호(金麟鎬) 총경을 영월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투경찰 제8대대[전성우 경감]와 홍천경찰서 및 인제경찰서 경찰 부대 100명으로 영월지구 전투 부대를 편성하여 영월을 사수하였다. 이에 김인호는 부대를 영월 주위의 고지에 배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상황을 수집하며 대응 태세를 가다듬었다.

1950년 7월 7일 오전 5시, 원주를 공략한 북한군은 계속하여 제천 북방 봉양을 위협하였다. 그로 인하여 강원도경찰국 비상경비사령부는 다시 단양으로 이동하였다. 비상경비사령부는 단양에서 철수한 경찰 병력을 계속하여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분산된 경찰력 대부분이 청주 방면으로 후퇴하여 단양에는 영월경찰서[이대인 경감]·정선경찰서[최형식 경감] 및 전투경찰 제8대대와 제9대대만 남아 있었다. 7월 7일 오후 3시경, 전투경찰 제9대대 3중대를 선두로 영월 시내에 돌입하였으나 북한군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 이에 따라 경찰 부대는 마차리 쪽의 외곽도로 장악을 위하여 경찰력을 집중 배치하고 북한군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7월 7일 밤 한 무리의 북한군이 마차리로부터 다시 침공하였고, 그 일부가 경찰 부대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상동읍 방면으로 우회하고 있었다.

7월 7일 오전 6시, 영월지구에서 상동읍으로 물러나 있던 전투경찰 제8대대 1중대원 47명은 김해수(金海洙) 중대장의 지휘하에 영월을 공격하고자 기관총 1정을 거치한 트럭에 탑승하여 상동읍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7월 8일 오후 2시경, 산솔면 녹전리 송현고개에 진출한 강원도 전투경찰 제8대대 1중대는 예상치 못하게 북한군을 가득 실은 트럭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에 전투경찰 제8대대 1중대는 선제적으로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적진으로 돌진하여 북한군의 30m 전방까지 도달하였고, 이내 김해수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용감하게 돌격하여 백병전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상황은 경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북한군의 후속 병력이 도착하면서 경찰이 포위되었고, 그 과정에서 김해수 중대장과 석상익(石商益) 경위가 차례대로 전사하면서 전열이 급격하게 무너진 것이다. 결국 이 전투로 김해수 중대장을 비롯하여 24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7명을 낸 경찰은 영월 탈환에 실패한 채 복귀하였다.

1중대의 패배 소식을 들은 전투경찰 제8대대는 새벽 1시를 기하여 3중대와 5중대를 송현고개로 급파하고, 작전참모 전형산 경위를 급파하여 1중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송현고개에 도착하기도 전에 화물자동차 13대에 병력을 채운 북한군이 녹전리와 서벽(西壁)을 거쳐 춘양으로 남하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기에 지원 병력은 녹전리로 가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춘양 외곽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3중대를 우측 강변에, 경상북도 전투경찰 11중대를 좌측 산악지대에 각각 배치하고, 5중대로는 북한군의 진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새벽 4시경 지원부대는 선발대로 보이는 북한군의 트럭 두 대를 발견하여 격파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후속 병력이 11중대의 후측방을 우회하여 접근하였으며, 이윽고 중화기 분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기관총 사수가 전사함에 따라 지원부대는 중화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결국 화력에서 밀린 지원부대는 8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고, 그 결과 윤명운 사령관이 계획한 영월 탈환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전진 공격을 지연시키는 데에는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았다. 직후 청주에 집결한 강원도경찰국은 경찰력의 유지와 전투태세 확립을 위하여 각 경찰서 단위의 부대 구분을 통합·재편하였다. 이후 영월 및 그 근방에서는 1951년 1월 14일~19일 남대리지구 전투, 1951년 1월 19일~24일 영월지구 전투, 1951년 2월 19일 737고지와 신병산(神屛山)·팔운산 전투, 녹전리 전투 등이 이어졌다.

경찰은 개전 초기 영월지구 수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한편으로 영월 지역 민간인 학살의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관련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0월 26일경 영월경찰서에 갇혀 있던 주민들 수백 명이 영월읍 영흥리 장릉(莊陵) 소나기재 두목골짜기에서 집단학살되었다. 이때 서면 후탄리[현 한반도면 후탄리] 인민위원장이었던 이태인이 북쌍리[현 쌍용리] 목영근과 함께 쌍용지서로 불려 간 후 영월경찰서로 이송되어 영월읍 두목골짜기에서 희생되었으며, 북쌍리 인민위원장 안양길 등도 경찰에게 연행되어 희생되었다. 1950년 10월 말에는 무릉리 아리골 인민위원장 김수규, 수주면[현 무릉도원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송갑현 등 다섯 명의 주민들이 청년방위대에 의하여 수주지서로 끌려간 뒤 무릉리 강변 등에서 희생되었다. 이들과 함께 전쟁 전 대한청년단장(大韓靑年團長)이었던 김관수도 희생되어 시신이 무릉리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이외 서면지서와 주천지서에서도 청년방위대원들이 잡아 온 주민들을 지서 뒷산에서 학살한 사실이 확인되며, 1951년 4월 11일에는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내리 임억수 등 네 명이 1951년 4월 11일 원경묵 등 봉화군 방위대원들에 의하여 총살당하였다. 원경묵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1951년 6월 2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불법체포·감금, 상해치사, 사체유기’ 죄로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원경묵은 방위군 11단 42지대 직속 전투중대장이었는데,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유곡리 권정양 가옥을 차용하여 60명의 방위군 사병과 함께 주둔하며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1951년 2월 5일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淸凉山)에서 빨치산과 교전 중 영월군 하동면 내리 주민 임억수 외 수 명의 이름이 기재된 문서를 발견하였고, 이들을 빨치산 협력자로 판단하여 체포한 후, 일부는 42지대 본부로 후송시키고 임억수를 포함한 일부는 4월 11일 살해한 것이다.

이외 영월에서는 미군 폭격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도 나왔다. 1951년 1월 27일 정찰기가 강원도 영월군 서면의 절구지마을과 배말을 정찰한 후 제트 전투기 4대가 마을을 공격하여 주민들이 희생당하였다. 전투기는 네이팜탄과 기총 사격으로 주민들을 공격하였는데, 미 폭격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정찰기는 인민군이 200명 정도 있다고 하였으나 전투기는 한 명의 적군도 볼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주민 15명이 사망하였다.

[결과]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면서 영월은 종전보다 더욱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동해안에서는 삼팔선을 넘어 북쪽으로 멀리 올라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이르고 중동부 지방에서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 등을 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 전 영월군은 삼팔선 인접 지역이었으나 휴전과 함께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중남부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당시 영월은 격전지였으며,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곳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휴전과 함께 휴전선에서 더 멀어지게 되어 복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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